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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오리 Dec 15. 2019

‘절망의 흐름’ : 봉준호 영화감독론

<기생충>을 필두로 한 봉준호 감독론




 봉준호는 스스로를 장르의 변절자라고 부르지만 동시에 장르영화감독이라고 칭한다. 봉준호는 영화에 자신의 시그니처를 새긴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장르를 ‘봉준호 장르’라고 부른다. 다양한 장르를 다루고 접합하면서 그의 시그니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봉준호의 시그니처는 장르의 다양성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꼭 장르에 적합한 형태를 띠기 위해서만 그의 시그니처가 바뀌어야 했던 것일까? 봉준호의 시그니처는 봉준호 영화의 흐름과 조응하며 이전과는 다른 결을 만들어 냈다. 이 글에서는 봉준호의 신작 <기생충>을 필두로 기존의 영화들과 비교하며 봉준호의 변화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얼굴의 사방과 조우하는 세계


 봉준호의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관객의 시선을 좌로 우로 꺾어버린다. 인물에게 아주 조용히 천천히 다가오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어느 순간 저 아늑하고 축축한 구멍으로 향하고 만다. 그때의 불편한 감정은 봉준호의 영화에서는 언제나 존재해왔다. 세계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어떤 관찰로부터 우리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는 듯 우리는 외면해왔던 뭔가를 발견하고 불편함을 그득 안고 가게 된다. 그래서 봉준호에게 얼굴의 전후좌우 사방은 단순한 인물의 어떤 측면이 아니라 세계를 설명하는 방법이 된다. 그 얼굴이 바라보는 곳, 바라보지 못하는 곳, 곧 바라봐야 할 곳, 그 인물의 뒤에 자리한 것, 인물들이 서로 향한 곳이 일종의 가이드가 된다.


 <옥자>에서 미자(안서현)는 결국 그 도살장에서 옥자만을 구한 채 철조망으로 구획된 길 바깥의 수많은 슈퍼돼지들의 끔찍한 도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새끼 슈퍼돼지 한 마리를 구한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걷는 것 밖에는 없었다. <설국열차>는 딱 세 방향으로만 영화를 찍었다. 열차를 기준으로 앞, 뒤, 그리고 오른쪽에서 카메라는 돌아간다. 우리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자를 읽는 것처럼 가장 익숙한 방향으로 왼쪽 꼬리 칸에서 오른쪽 앞 칸을 향해 영화는 전진한다. 주요한 갈등이 빚어질 때마다 인물은 스크린 디렉션에 따라 왼쪽에 놓인 것, 오른쪽에 놓인 것 중 선택하게 된다. 후반부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디렉션에 제동이 걸린 순간이 온다. 엔진 앞에서 커티스(크리스 에반스)와 남궁민수(송강호)가 서로 마주 보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 남궁민수가 ‘진짜 문을 열고 싶다’고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키며 말할 때 카메라는 회전하며 그 손이 향한 열차의 바깥문을 가리킨다. 그때 우리는 알 수 있다. 스크린 디렉션 속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열차 안에서의 전진과 후진만이 주어진 숙명인 ‘꼬리칸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실은 그 방향은 열차라는 환경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한 것을. 우리는 열차에 갇혀있는 존재라는 것을 봉준호는 이야기하고 있다. 인류 전체를 둥지 속에 소외된 자들을 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그려내었던 봉준호는 <기생충>에 이르러서는 소외된 자들을 오히려 지하 깊숙이에서 꺼내었다가 다시 가둬버리는 데에 이른다. <기생충>에서 가정부 문광(이정은)이 돌아와 지하실의 문을 열어젖히며 아니 스크린을 찢으며 그 뒤에 감춰진 것을 보여준다. 그리곤 결국 기택은 그 지하에 갇혀버린다, 아니 스스로를 가둬버린다. 벙커 문 뒤에 감춰져 있던(근세라는) 세계의 진면모를 드러내 보이며 진실은 그 지하공간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다.



2. 장광설


 카메라가 인물에게서 공간으로 파고들며 세계의 면모를 보여주는 이와 같은 봉준호 특유의 시선은 사실 그의 초기작 <플란다스의 개>에서의 장광설과 함께 시작되었다. 카메라는 장황하게 이야기를 풀어대는 변경비(변희봉)의 현란한 고갯짓, 손짓을 따라다니며 관객의 시선을 포획한다. 그 손이 향하는 곳, 저 어두컴컴한 지하 공간 속으로 카메라를 들이미는 것이다. <괴물>에서 희봉(변희봉)의 장광설은 희봉의 시선에서 잠에서 깨어난 강두(송강호)의 시선으로 옮겨가며 컨테이너 슈퍼 밖에서 빗물을 마시고 있는 ‘괴물’에게로 다시 옮겨간다. <플란다스의 개>에서부터 <괴물>, <마더>, <설국열차>에 이르기까지 인물에게서 시작된 시선이 세계와 조응하는 방식은 점점 거대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광설은 이야기의 얼개에선 하등 상관없더라도 그 흐름을 멈춰 세우면서도 귀 기울이게 만들며 장르를 뒤틀어버린다. 장광설은 그 자체로 기능하지 않고 뒤이은 풍광과 조우하면서 시너지를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에 다소 비약이 심한 비현실성을 품고 있다. <마더>에서 도준 모(김혜자)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공변호사(여무영)의 장광설은 그 공간 자체에서부터 비현실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여성 접대부가 있는 공간으로 ‘어머니’라는 존재를 불러왔다. 노골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이 장면에서 도준 모는 ‘저기요 우리 아들은요’ 하고 말끝을 흐린다. 그런 그녀의 옆얼굴 바로 다음에 붙는 것은 시점 숏 카메라를 바라보는 어린 도준(원빈)의 정면 얼굴과 박카스 병이다. 그 장면은 도준 모의 시점 숏으로 도준 모의 기억이다. 도준 모가 왜 그 장면을 그 순간 떠올렸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비이성적이며 균질하지 않은 두 장면(그때까지는 그것이 농약인지 알 수 없었던)을 이으면서 이상한 충돌이 생긴다. 그것은 후에 면회실의 장면으로 이어진다. 얻어터진 얼굴을 보이기 싫었던 도준이 옆으로 앉아서 엄마와 대화하고 있다가 기억이 난다고 말한다. 도준은 도준 모가 자신이 5살 때 박카스에 농약을 타 마시게 했다는 얘기를 한다. 이때 도준은 정면(도준 모를 향해)을 응시한다. 어린 도준이 5살 때 박카스 병을 주는 어머니를 정면으로 응시한 그 장면과 똑같이 현재의 도준은 어머니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때의 접합을 위해 장광설이 존재했던 것이다. 교도소 바깥에서 도준을 둘러싼 사건과 싸워나가야 하는 도준 모와 도준의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을 담아내기 위해서다. <마더>에서 얼굴의 측면은 영화 전반부에 걸쳐 반복되는 하나의 법칙과도 같다. 때문에 오히려 이런 응시는 장면을 부각하는 효과를 얻는다. 도준 모가 피해자의 장례식에 가서 “내 아들은 아니야!”라며 광기 가득한 말을 내뱉는 장면에서 정면 숏이 활용된 것처럼 말이다. 공변호사의 장광설은 이야기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이야기의 기능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다. 공변호사의 장광설은 이어 붙은 장면과 시너지를 내며 이야기를 축약한다. 봉준호는 이런 이미지의 연계와 얼굴의 방향을 통해 이야기의 약도를 그리게 만든다. 



3. 삑사리


 장광설과 함께 시작된 ‘인물에게서 세계로의 확장’은 <옥자>, <기생충>에 이르러서 장광설 없이 홀로 인물의 사방과 조우하게 되었다. 하지만 장광설이 사라진 봉준호는 어쩐지 아쉽기만 하다. 장광설의 사라짐은 장광설이 주는 기괴한 포착이 사라졌다는 사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크게는 봉준호가 가진 특유의 흐름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봉준호가 장르를 파악하는 주요한 요소는 바로 흐름이다. 그 흐름을 꺾고 멈추고 다시 돌진시키면서 거기에 이른바 한국적이라고 말하는 봉준호의 색을 입혀온 것이다. 바뀐 것은 장광설뿐만이 아니다. 장광설과 삑사리는 흐름을 끊어주는 또 하나의 흐름이다. 봉준호의 흐름을 책임지고 있었던 주요한 요소 ‘삑사리’도 변화하였다. 장광설은 이야기를 축약시키고 비약하는 비현실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삑사리는 정반대의 역할을 담당한다. 삑사리는 기계처럼 맞물려가는 거대한 흐름을 끊어주며 현실을 환기시키는 하나의 현실인식으로써 존재했다. <괴물>에서 초반 10분 만에 등장해 카메라를 향해 돌진하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슬랩스틱 개그를 하듯 미끄러진다. 합동 분향소에 등장한 요원(김뢰하)도 넘어진다. 클라이맥스에서 남일(박해일)의 손에서 화염병이 미끄러지는 순간도 삑사리다. 삑사리는 이렇게 주요한 순간 흐름을 끊으면서 현실감각을 일깨운다. 현실에서는 드라마처럼 택시를 잡기 위해 거리로 나서면 택시가 바로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짧은 순간이며 영화의 흐름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지만 이렇듯 현실은 종종 미끄러지게 마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기생충>에서의 삑사리는 그조차 거대한 흐름 중의 하나이고 우리는 이것을 거부할 수가 없다는 가장 핵심적인 인식으로 자리매김한다. <기생충>의 삑사리는 흐름을 끊어주는 역할로부터 벗어 나와 오히려 각 인과관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마치 케이퍼 무비처럼 진행되는 영화의 전반부는 기택 가족의 의도, 목적이 그대로 실현된다. 거대한 흐름이 기계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박사장의 가족이 캠핑이 간 사이 기택의 가족은 박사장의 집을 차지한다. 그때 기택의 가족에게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등장한다. 박사장에게 해고당한 가정부 문광이다. A에서 B로 상황이 바뀔 것이라 예상하지만 느닷없이 ‘ㄱ’이 등장한다. 사실 문광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예상은 가능하다. ‘이정은’이라는 배우의 존재감을 잘 알고 있었던 한국 관객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기정으로 인해 해고된 김기사라는 캐릭터와 달리 문광에게는 박사장의 집에서 쫓겨나 골목을 내려가는 ‘씬’을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야기의 어떤 위치가 되었건 문광은 돌아올 것이라 예측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응당 박사장의 가족이 돌아올 것이라 예상했던 순간에 문광을 등장시킨다. 문광이 돌아오게 될 순간이 일련의 이야기가 펼쳐지다가 그 이야기를 닫아버리고 봉해버릴 용도로 사용될 것이라는 관객의 예측을 배신해버린다. 이야기의 곁가지라고 여겨졌던 문광의 존재가 갈등의 전면부에 드러나며 이제 관심은 오로지 문광에 대한 궁금증으로 집결된다.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난 문광은 지하실의 문을 열어버린다. 이때부터 <기생충>은 갖가지 삑사리에 의해 꺾어진다. 벙커에서 충숙과 문광이 입씨름을 하고 있던 도중 기택의 가족이 계단에 미끄러져 나뒹구는 것부터 박사장 네 가족이 다시 돌아오자 기택의 가족이 박사장 네 가족을 피해 여기저기에 숨고 박사장의 집을 나와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서도 그래서 임시대피소에서 하룻밤 자게 된 것도 기우가 근세(박명훈)를 죽이기 위해 지하로 내려갈 때 들고 온 산수경석을 떨어트리는 것도 크게 보자면 다 삑사리에 속한다. 이런 삑사리들은 그것으로 파생되는 또 다른 이야기를 향해 점층적으로 돌입하게 하는 하나의 문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보자면 삑사리 자체가 기택의 가족에게 주어진 유일한 문이며 그들의 맞이하게 될 운명인 것 같아 보인다. <기생충>에서 쓰는 언어로 다시 말하자면 ‘계획할 수 없는,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이다. 그리고 그 모든 비극의 원흉은 기택의 가족으로 하여금 박사장의 집에 기생하도록 계획하게 만든 산수경석이다.



4. 산수경석


 봉준호 감독은 왜 하필이면 상징적 오브젝트로 사용한 것이 산수경석이었냐는 질문에 ‘죽어 있는 상태’라는 것이 필요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오히려 산수경석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확히는 스스로 어떤 의지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봉준호 감독이 말하는 ‘죽어 있는 상태’라는 것이 ‘죽어있지만 사실은 살아있는’이라는 의미였을 지도 모르겠다. 산수경석은 스스로 물에서 떠오르기도 하고 기우의 손에서 굴러 떨어져 결국 기우를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것으로 봤을 때 나는 이런 구조 자체가 산수경석 스스로의 의지처럼 느껴졌다.


 기우는 산수경석을 보고 “야 이거 되게 상징적인 거네.”라고 산수경석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기우는 영화 내내 그런 식으로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인물이다. 부질없는 짓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산수경석의 의미에 대해 기사식당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민혁이였으면 어떻게 했을까?’와 같은 질문을 던지기도 하면서 어떤 일이 벌어진 이유에 대해 의미를 자꾸 갖다 붙이고 그것을 상징화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노상방뇨를 하는 사람에게 그때까지는 자신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물건이라고 생각한 산수경석을 들고나갔으며 물난리가 난 집에서 산수경석을 들고 한참을 생각하는 것이다. 산수경석을 꼭 끌어안고서 ‘이 돌이 자꾸 나한테 들러붙어요.’라고 말하고 근세를 죽이기 위해 하필이면 산수경석을 가지고 왔으며 그걸 들고 어딜 가냐는 다혜(정지소)의 말에 ‘밑으로 가야 해 더 밑으로’라는 상징적인 말들을 내뱉는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을 겪은 후 일명 ‘근본적인 계획’을 세우게 된 기우는 산수경석을 자연 속으로 돌려놓는다. 기우는 의미를 생각하고 의미적인 말을 하고 의미를 수행하려고 한다. 원인과 결과를 바꿔보자면 산수경석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기우가 있었기에 산수경석이 하나의 의식체로 보인 것일 수도 있겠다. 산수경석은 마치 살아있는 삑사리의 분신 같다. 삑사리도 산수경석도 그들이 비극으로 돌입하게 하는 공범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5. 절망


 주요한 것은 산수경석이 무엇이든 간에 봉준호가 왜 그것을 넣어두었냐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삑사리에게 왜 이토록 많은 역할을 맡겼냐는 질문을 하고 싶다. 세계의 불확실성을 송두리째 하나의 관념 속으로 집어넣고는 나머지 파편으로 매끈한 흐름을 만들어 놓은 이유는 무엇인가? 심지어 봉준호는 그 관념에게 생명력을 주었다.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선 그것의 목적에 집중해야 한다. 기택의 도망은 마치 무언가로부터 쫓겨나는 듯하다. 카메라는 그런 기택의 등을 밀어붙이는 것 같다. 무언가가 그를 그곳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기택이 주차장으로 기어들어가는 순간에 카메라에 잡힌 CCTV는 선이 끊어져 있다. ‘문광’이 잘라놓은 것이지만 이렇게 절묘한 장치는 벙커로 흘러가는 것이 기택의 운명이라는 듯 준비된 것 같다. 문광의 남편 근세는 기우를 공격한 후 지하실로 내려가는 비밀 문을 닫았다.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로 인해서 기우를 찾아다니던 다혜가 지하실에 있던 기우를 발견할 때 지하벙커의 존재를 끝끝내 알 수 없게 되었고 때문에 기택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벙커에 숨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결국 기택이 벙커로 흘러들어 간 것은 운명이 철저하게 설계해놓은 덫으로 유인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덫에 빠졌을 때 우리는 그 무언가의 정체를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절망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보이는 기택의 모습을 통해,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는 무계획만이 실패를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는 기택의 절망을 통해 봉준호는 절망하고 있다. 절망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의지가 또렷한 비극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다. 실제 세계의 진면모가 어떻게 되었든 감독은 절망하고 있다. 절망하기 때문에 절망의 속도를 늦출 수가 없다. 그래서 장광설도 사라진 것이다. 장광설은 유배된 것이다. 낙하하는 물체는 멈출 수가 없으니까. 매끈하다고 생각되었던 이야기는 사실 급박한 속도로 브레이크도 없이 미끄러지는 이야기였다. 기택은 절망으로부터 쫓겨난 것이다. 절망이 기택을 벙커로 몰아넣었다.



6. 회귀


 봉준호의 이야기는 언제나 회귀를 꿈꾸었다. <플란다스의 개>는 지리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고 <괴물>은 다시 그 황량한 한강 둔치의 슈퍼로 돌아갔고 <살인의 추억>, <마더>, <설국열차>, <옥자>도 모두 회귀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 회귀들은 언제나 상흔을 남겼다.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의 회귀를 통해 이전과는 달라진 인물들을 마주하면서 우리는 영화의 앞과 뒤를 이어 본다. 이때 발생하는 효과는 오히려 직선적인 영화들보다 선명하다. <괴물>의 강두는 이제 두 눈을 부릅뜨고 세상을 마주하게 되었고 <마더>의 도준 모는 자신의 죄악 속에서 사랑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자기 인식을 하면서 도준의 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옥자는  자본주의의 고리를 끊을 수 없는 절망을 한편에 간직한 채 시골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생충>의 회귀는 다르다. 기택의 회귀는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왜 기택은 벙커를 택한 것일까? 영화의 구조상 영화가 한 단계 한 단계 밟아나간 장면들을 봤을 때 어쩌면 기택이 지하벙커로 들어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원래 지하벙커에서 살고 있던 문광의 남편 근세는 마치 기택의 또 다른 자아, 혹은 미래처럼 보인다. 기택이 회귀해야 할 곳이 이 곳 지하 벙커라는 것 같다. 근세가 대만 카스테라 사업을 했고 그것이 실패했다는 얘기를 할 때 카메라는 그것을 몰래 엿듣고 있는 기택을 클로즈업한다. 기택도 대만 카스테라 사업을 했고 그 사업은 실패했다. 근세는 기택과 상당 부분 겹쳐있다. ‘난 여기가 편해. 아예 여기서 태어난 것 같고 결혼식도 여기서 한 것 같아.’라고 근세는 말한다. 근세의 체념은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도피한 것이고 인간으로서의 존엄보다는 동물적인 욕구만을 해결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다. 그런 근세에게 기택은 ‘앞으로 어떡할 거야? 당신 계획도 없지?’라고 말한다. 기택에게도 근세의 삶은 너무나 비참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기택은 영화의 후반부로 가면서 자신의 존엄이 묵살되는 것을 목도하고 그것에게 강한 적대감을 표출하지만 이내 그 적대감으로 인해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고 근세가 도피했던 지하벙커, 삶의 바깥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근세가 벙커에서 살아가며 느꼈을 감정보다 한층 더 절망적인 자기 인식을 하면서 말이다. 기택이 벙커로 숨어 들어갈 때 기택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바깥세상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무도 모르는 기생 서식지 ‘지하 벙커’로 숨어드는 것이다. 기택의 눈에는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지금은 그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박사장의 집에서 도망치지만 기택이 그 길을 통해 바깥 어딘가로 숨어들게 되면 언젠가는 기택을 쫓아올 것이라는 것을 기택은 안다. 그래서 그는 주차장을 통해 다시 집안으로, 지하벙커로 숨어 들어간다.


 그렇게 덫에 걸린 기택이지만 벙커에 들어간 이후로는 얼마든지 그 덫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기회는 있었다. 기택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있다. 자수하는 것. 그것은 언제나 가능했다. 기택이 자수했다면 법에 의한 처벌을 받을지언정 따뜻한 밥과 볕이 드는 방에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면회를 통해 가족과 소통할 수 있을 것이고 어쩌면 수감생활이 끝나고 사회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적긴 하지만 충분히 있다. 그것이 끝을 알 수 없는 불안한 기생 생활을 하는 것보다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기택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문은 봉준호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로 이어진다. 앞서 말했듯 확실히 현재의 봉준호는 절망한다. 예전처럼 깃발을 세우며 선두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나지막이 말한다. 절망하고 낙담하는 인간의 최후를 보여주면서 선택지가 없을 것이라 믿는 지금에도 어쩌면 선택할 것들은 있다고 말이다. 감독은 운명이 우리 빈자의 삶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갔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알 수 없는 운명에 의해 존엄을 잃어버릴 수 있는 자리에 우리를 가져다 놓았지만 절망적인 그 현실보다 그 운명을 거부하지 못하고 낙담해버리고 포기해버리고 마는 무기력한 자기 인식이 더 절망스러운 현실이라는 것을 기택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7. 응시


 <살인의 추억>에서 범인을 노려보던 박두만(송강호)의 날카로운 응시는 어느덧 기우의 기력 없는 응시로 돌아온다. 기택과 달리 기우에게는 더욱 가혹한 현실이 눈앞에 존재한다. 엔딩에서 카메라를 정확히 바라보는 기우를 통해 우리는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물론 기우의 응시는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끌어내리는 운명을 응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면 앞서 말했듯이 기우는 의미에 대해서 고민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환상 같은 꿈속으로 도피하는 순간에 이르러 기우는 한사코 그들의 운명을 관찰하던 카메라를 보는 것이다. 물속에서 떠오르는 산수경석, 물난리가 난 기택의 동네 골목을 관망하는 카메라, 수재민들이 모여 있는 실내 체육관을 내려다보는 시선, 근세와 박사장의 대면에서 박사장이 근세를 내려다보자 근세가 박사장을 올려다보는 숏, 박사장을 살해한 기택이 박사장의 집을 빠져나가는 장면에서 기택을 마치 절대자처럼 앙각으로 찍어 누르는 카메라를 직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카메라, 너는 누구냐?’



8. 문


 <기생충>을 보고 오랜 시간 동안 나는 한 가지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근세는 왜 기우를 공격한 후에 벙커의 문을 닫았을까? 근세가 벙커의 문을 닫았기 때문에 기택의 도피가 가능하다. 근세가 그 문을 닫아야만 하는 그럴싸한 이유가 있는가? 없다면 근세의 행동은 감독이 엔딩을 위해 만든 궁여지책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어딘지 모르게 석연찮았다. <마더>에서 진태(진구)가 도준 모에게 사건의 수상함을 얘기할 때 열었다가 닫는 문 사이로 빗소리가 들렸다가 멈춘다. 진태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옥상을 이야기한다. 도준 모가 진태에게서 사건 현장의 수상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사건 현장 옥상으로 가자 ‘암튼 이 동네 자체가 이상해’라는 진태의 나레이션이 깔리며 온 동네가 다 보이는 전경이 드러난다.


 두 작품을 통해 반복적으로 드러난 이 의미 없는 행위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봉준호에게 인물의 행동이라는 것은 인물의 수렴 가능한 논리적 구조 바깥의 것이다. 오히려 세계와 맞닿아있는 지점이다. 그 행동의 당위를 인물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흐름과 연결 지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마더>에서의 그것은 일종의 텐션을 만들어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하필이면 굳이 왜 문이 열고 닫히는 거냐고 물을 수가 있다. 문이 열리고 닫힌다는 단순하고 당연한 이치를 통해 영화는 열리고 닫히는 것이다. 조금 더 과도하게 연결 지어보자면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다시 닫히며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줄곧 얘기해왔듯 다시 돌아간 그곳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닫힘이다. 그 사이로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통과했고 다시 봉해지는 순간 그 문 안에 담긴 것은 이전과는 다르다.


 <설국열차>는 그야말로 문을 여는 영화다. 미지의 공간을 하나씩 점령해가며 기차의 끝에서 맨 앞에 이르렀을 때 그들에게 주어진 숙명은 결국 열차에 올라탄 그 날로부터 다시 열차 밖으로 벗어나는 순간인 회귀인 것이다. 결국은 회귀의 세계 속에서 인물들은 자신이 속해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공명은 문이 열렸다 닫히는 동안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 것들로 이루어진다. 봉준호의 세계 속에서 아늑하고 축축한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카메라의 시선은 그 문틈으로 들어온 것들을 비춰보며 우리가 오래도록 쓰지 않은 근육을 움직이게 한다. 



9. 통제된 순간


 ‘봉준호는 변했다. 왜 봉준호 영화의 흐름이 바뀌었나.’라는 질문으로 봉준호의 주요한 개념들을 뜯어보았지만 정확히는 봉준호는 자신의 시그니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변주하고 있다. <기생충>에서는 계단으로 명징하게 드러나는 구조를 위해 시그니처들이 변주되었다. 우선 장광설은 사라졌다. 박사장의 가족이 캠핑 간 사이 박사장의 집을 차지한 가족들이 떠드는 씬과 모든 일이 끝나고 기택이 전보로 편지를 보내는 씬이 있지만 그 이야기가 고요한 가운데 펼쳐졌다는 특성 말고는 흐름을 멈춰 세우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니다. 흐름이 멈춰있을 때 삽입된 것뿐이다. 삑사리는 오히려 흐름을 가중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자신의 자리를 되찾아가는 순환의 구조는 부동의 결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열려있다. 그것이 불가능에 가까우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만 (그래서 더 잔인하지만) 그래도 열려 있다. 이 모든 것은 계단적인 플롯을 만들기 위해 봉사하고 있다. 미끄러지는 낙하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감독은 계단의 구조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시그니처를 통제하고 있다. 


 통제된 것은 그 시그니처뿐만이 아니다. 봉준호는 자신의 영화에서 감독과 배우가 역전되는 순간을 즐긴다고 말했다. 필자 또한 그런 순간을 사랑한다. <살인의 추억>에서 두만의 가장 극적인 순간 빈칸으로 남겨뒀던 마지막 대사를 송강호는 ‘밥은 먹고 다니냐?’라고 스스로 채웠다. <마더>에서 피해자의 장례식장에 찾아간 김혜자가 ‘사실은 우리 아들이 안 그랬거든요’라고 말하며 섬뜩한 표정을 지으며 이성을 잃은 엄마의 모성을 화면에 채워 넣었다. 그 인물로 살아가는 배우들이 인물을 만든 감독조차 알 수 없으며 파악할 수 없는 지점을 채우며 봉준호의 세계를 확장시켰다. <기생충>에서도 물론 여러 극적인 순간이 있다. 기택이 박사장에게 ‘그래도 사랑하시죠?’라고 물었을 때 ‘사랑이라고 봐야지’라고 대답하는 박사장의 말과 표정 속에는 순간적인 적대감이 보였다. 다송의 생일파티에서 난동이 벌어지고 난 후 박사장이 근세의 냄새에 코를 잡을 때 그것을 보고서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기택의 표정을 통해 우리는 순간적으로 반응하는 인물의 감정적 절정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런 절정의 순간들이 봉준호가 계획해놓은 세계를 확장시켰는가라고 묻는다면 조금 의문스럽다. 물론 배우들의 연기는 적확했고 그래서 감독의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기능하지 않는 것이다. 적재 적시에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적확하게 표현하는 것에는 더할 나위 없었지만 배우의 표정, 몸짓, 말들이 영화 바깥으로까지 튀어나가며 강하게 각인되며 이 영화 전체를 끌고 나갈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면 <기생충>의 극적 순간들은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봉준호의 구조, 봉준호의 계획 속에서 다음 단계를 향한 하나의 계단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뒤이어지는 장면에게 영화적 순간의 바통을 넘겨버리는 것이다. 우스갯소리이지만 기택의 연기를 지도하는 기우에 대한 묘사도 단순히 대배우 '송강호'에게 연기를 가르치는 웃긴 상황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어쩌면 봉준호의 자의식이 배우들을 통제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묘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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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변화의 근간에는 세계에 대한 절망이 스며있었기에 가슴 아픈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통제되어 있는 적확한 움직임으로 그려내는 절망은 어딘가 석연치가 않다. 물론 세계는 절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파편화된 현실의 이어짐은 현실의 단면이 아니다. 그것이 비록 단계 단계를 밟아나갔을 지라도 그 근간을 뒷받침하는 절망을 설명해낼 수 없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알 수 없는 이 참담함을 그냥 통째로 삼켜야 할 뿐이다. 그것이 그냥 계급이 주는 서글픔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 스스로가 절망을 인정하는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다. 작가 자신의 내면에서 잉태된 세계에 대한 심상을 스크린으로 그려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봉준호는 ‘이 영화에 대해서는 여한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전력으로 찍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정면을 응시하는(기우의 마지막 응시) 절망이라면 어쩌면 언젠가 다시 이 세상으로 건져 올려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봉준호는 다음 영화에서는 자신의 시그니처를 또 다른 방식으로 짜 맞추며 영화의 흐름을 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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