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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오리 Apr 05. 2020

희대의 찌질이

영화<인비저블 맨>

 스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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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저블맨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투명인간을 다루는 공포영화이다. 그동안의 투명인간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매드사이언티스트의 관음적 욕망을 드러내며 관객을 투명인간의 시점으로 던져놓고서는 인간 내면의 쾌락을 향한 욕구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리 워넬 감독의 <인비저블 맨>은 반대로 보이지 않는 자에 의해 피해당하는 피해자의 공포를 다루고 있다. 사실 투명인간이란 소재로 이런 시의 이야기가 이제서야 나오는 것도 신기하다. 그동안 다른 종류의 공포영화, 괴수영화들은 하나같이 보이지 않는, 숨겨진 어떤 미지의 존재로부터 쫓기는 구도가 대부분이었는데 투명인간에 대한 소재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유치하지만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심심풀이로 이런 질문을 하고 받는다. 만약 투명인간이 된다면 뭘 하고 싶냐고.  이런 질문은 서로의 숨겨진 욕망을 드러내는 간단하고 재밌는 질문이다. 그동안 우리에게 투명인간이란 익명성이 주어지면 곧장 고삐가 풀려버 감춰진 욕망에 대한 상상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리 워넬의 <인비저블맨>은 그런 상상력을 현재에 가장 화두되고 있는 큰 이슈와 결합시키면서 관찰하는 누군가가 아니라 관찰당하는 누군가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슈는 가스라이팅이다.


<인비저블맨>은 애드리안(올리버 잭슨 코헨)에게서 데이트폭력, 가스라이팅을 당해 오던 세실리아(엘리자베스 모스)가 애드리안으로부터 탈출하면서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에 대해 다룬다. 제목에 떡하니 나와있듯이 영화에는 투명인간이 나오지만 관객들은 그 투명인간의 정체를 정확히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확신이 서지 않는다. 애드리안으로부터 파생된 무언가라는 것은 확신하지만 그것이 세실리아의 트라우마인지 혹은 애드리안의 영혼인지 아니면 애드리안 초월적 변형체가 된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천천히 극이 진행되어가면서 우리는 그 존재의 정체를 정확하게 확신하게 되는데 여러 관객들은 이 투명인간의 정확한 정체를 영화 스스로가 발설한 것이 관객들이 공포영화에게서 기대하는 장르적 요구를 저버리는  패착이라고 말한다. 투명인간을 설명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은 그것을 오히려 시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패착이라고 보지 않는다. 일부 관객들은 초반부의 보이지 않는 공포가 후반부에서 까발려짐으로 장르의 쾌감이 덜어졌다고 불평하지만 사실 이 영화의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다. 시시함.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을 조종하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신으로 군림하고자 하는 자들. 그들의 실체는 결국 신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이 세상에 발붙이고 사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그 두려움의 실체를 대놓고 공개해버린 것이다.

공포영화를 만드는 감독에게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공포영화가 스스로 공포를 상쇄해야 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지금껏 공포영화의  가치는 주로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그 두려움이 잔상처럼 남아 있어야 좋은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른 포지션을 취했다. 나는 그것을 용기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 공포영화는 일종의 성장영화가 되려고 한다.



 영화의 초반부 주인공에게 주변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이미 죽어버린 그에게 너를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넘겨주지 말라고. 관객들은 다소 헷갈릴 것이다. 정말 그는 죽은 것이고 그녀는 그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는 어떤 초인적 존재가 되어서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것인가? 이런 의문이 애드리안이라는 캐릭터를 초월적 존재처럼 느껴지게 한다. 또 그로 인해 그녀가 가진 트라우마와 공포심은 더욱 극화되며 관객들이 답답하도록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그다음은 무엇이어야 하나? 무엇이 어디서나 나를 옥죄어오는 무형의 존재감을 극복하게 하는가? 감독은 그것의 실체를 보라고 이야기한다. 나를 영원히 지배할 것 같았던 존재의 무게감 그것의 실체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감독은 기필코 그 두려움의 실체가 얼마나 초라한지 보여준다. '자 여러분 이거 보세요. 당신이 두려워하던 게 고작 이겁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애드리안이 실제로 죽은 존재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할 수도 있다. 투명인간의 실체가 애드리안에게 세뇌당한 세실리아의 트라우마였다면 얼마나 더 끔찍하고 무서울까? 맞는 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영화가 말하는 바로 보건데 '그가 진짜로 죽은 뒤에 그녀를 조정하는 것'이라도 그 실체는 매 한 가지라는 결론을 낼 수 있다. 애드리안이 실제로 죽어서 그녀를 지배하려고 했다면 세실리아가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애드리안이 고깃덩어리였고 지금은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는 산자를 지배할 수 있는 망자도 아니고 초인적 존재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고깃덩어리다. 애드리안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는 물리적 존재이다. 결국 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공포심 그 자체를 영화로 구현하고 관객에게 그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과연 가치 있는 공포영화란 무엇인가?' 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까발리는 것이 이 소재를 다루는 진정한 영화적 가치라고 판단한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가 두려워했던 그것은 고작 인간이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우리를 조종할 수 있다고 속삭이지만 죽음을 위장할 뿐 죽을 용기는 없는 겁쟁이다. 그들이 누군가를 지배하고자 하는 바람은 한갓 소유욕이며 아무리 지배에 미친놈인 척 해도 무언가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살아 있어야 되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동생을 가해자로 둔갑시키며 살아있는 존재로 이 세상에 돌아온 것이다. 결국 그는 육신을 버린 강인한 존재인 척 하지만 육신이 없는 척 육신 위에 거짓말을 입고 있는 자일뿐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자신의 우월성은  고작 육신의 죽음 앞에 패배하는 똑같은 인간에 불과하다. 희대의 악마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도태된 찌질이다. 영화는 그렇게 까발리고 있다.


나는 우리가 두려워했던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달래주는 공포영화는 처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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