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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오리 Aug 26. 2019

가장 사적인 도시

영화 <시네도키, 뉴욕>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우리는 ‘나’ 자신을 바라본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반사가 없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를 확인받을 수 있는가? 우리의 사진, 우리의 그림, 우리 곁의 사람들과의 소통으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든 구체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나의 고유성, 이 지구 상에 나와 똑같은 위도와 경도에 존재할 수 있는 사물은 자기 자신밖에 없으며 그것은 온 우주 속 단 하나의 처절한 외로움이다. 고유하다는 것이 주는 슬픔을 받아먹으며 우리는 우리의 복제품을 만들어낸다. 나의 글, 나의 시, 나의 영화, 나의 그림, 나의 음악, 나의 배역, 나의 발명품들을 만들어내며 우리는 창조물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처럼 여긴다. 그러나 내 인생의 복제품들은 의미를 갖고 있을지언정 나의 인생 자체는 그럴 수가 없다. 나는 아직 죽음에 이른 적이 없으며 나는 누군가에게 의해 전시되지도 상영되지도 편집되지도 않았다. 나의 삶은 아직 날 것이며 문자로 다 적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의미를 간구한다.

 케이든이 만들어놓은 연극 세상은 실제의 세상(영화에서 말하는)을 재현해놓은 것이다. 그 극장 안에는 또 같은 극장이 있고 그 극장 안에는 예의 것과 또 같은 극장이 있다. 거울 두 개를 마주 놓고 수많은 반사된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끊임없는 재생산의 과정을 거치면 나의 고유한 고통이 그들에게 옮겨갈 것이라고 희망하면서 말이다. 그들을 관찰하고 그들을 지도하면서 그들을 통해 자신을 관찰하게 되면 의미를 부여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케이든은 모든 순간 스스로 선택해야 했고 그가 자신의 연극에게서 드러나길 원했던 ‘잔인한 진실’은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그가 남긴 것은 결국 자신을 재현하기 위해 만든 또 하나의 도시였고 그 안에는 케이든 자신 외에 존재하는 수많은 연기자, 아니 도시민들이 있다.

 케이든이 극장 속 무대 세트 건물의 외벽이 밖에서 훤하게 보인다는 사실이 거짓처럼 느껴진다고 제4의 벽을 지우고 외벽을 세웠을 때 그 칸과 칸, 방과 방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은 누군가에게 관찰되는 존재로서가 아닌 각자의 개인적인 공간을 가지게 된다. 다시말해 그들은 방공호 극장 세상 속에서 위도와 경도를 부여받은 고유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들이 누구를 연기하든 그들은 고유한 객체가 되고 창조자에게서 하달되는 의미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케이든의 배역을 맡은 새미는 케이든이 자살시도에 실패한 것과 달리 성공적으로 자살하게 되고 고유한 존재가 된다. 새미가 헤이즐을 사랑하는 것이 새미로서 사랑한 것인지 케이든의 분신으로서 사랑한 것인지 알 길은 없지만 어쨌거나 그는 케이든을 벗어난 하나의 고유한 자신으로서 헤이즐을 사랑하고 있다고 알리고 싶었던 것이었다.


 영화는 스크린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반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가 고유한 무언가라고 그 어떤 영화도 연극도 시도 소설도 거기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한 들 그것은 단지 반사판일 뿐이라고. 우리의 세상은 우리의 도시는 가장 사적인 나를 담고 있는 공간이라고. 우리 각자가 고유하다는 말이 이토록 외로운 세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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