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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고래 Apr 20. 2024

조경가의 일

영화 <땅에 쓰는 시_조경가 정영선의 사계절 이야기>를 보고

'어? 저긴 어디지?'

버스를 타고 창 밖을 보다가 다급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지도 앱을 켜서 '내 위치'를 확인했다. 스쳐 지나간 공원의 모습이 뭔가 특별하게 눈에 띄었다. 왠지 모르게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 그 공원에는 꼭 가봐야지 체크했고- 그 이후로도 버스를 타고 같은 자리를 지나며 몇 번이고 이 공원에 가야 하는데... 생각했다.


그건 샛강 생태공원이었다.

어느 날은 친구랑 꽤 긴 구간으로 한강 산책을 하다가 멈춰 편의점에서 물을 사 먹으며 숨을 돌리고 있었다.그저 우연하게 멈춘 구간이었는데, 강 건너의 풍경이 눈에 띄게 아름다웠다. 그날 우리는 '이 구간이 한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 같다.'며 입을 모았다.


선유도 풍경이었다.

선유도의 키 큰 나무들

두 장소는 거대하고 삭막한 빌딩숲, 바쁘고 혼잡한 도시 서울에서 내게 '쉼'을 주는 장소 리스트로 등록되었다. 봄, 가을에는 점심을 싸들고 선유도 풍경을 감상하며 햇살을 받으며 점심을 먹기도 하고, 고즈넉하고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이 필요할 때는 샛강 생태공원을 거닐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장소였건만... 나는 두 공간을 '디자인 한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특히 샛강 생태공원의 경우는 다른 한강 공원들보다 훨씬 더 훼손되지 않은 자연 같다, 그런데 어쩜 이렇게 잘 정돈되었지?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 공원을 누군가가 일부러 디자인했을 거란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얼마 전, 콘텐츠 구독 서비스인 롱블랙 콘텐츠를 통해 내가 좋아하는 이 두 장소가 '정영선'이라는 한국 1세대 조경가의 손길과 애정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정조경가 외 다른 수많은 동료들이 함께한 결과물이지만, 그녀의 방대한 식물과 조경에 대한 지식, 국토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의 공간이 되었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매년 봄이면 남쪽으로 꽃놀이를 떠나 매화, 산수유, 목련을 보며 봄맞이를 해야 하고, 등산을 하면서도 수피나 나뭇잎을 살피며 이것저것 궁금해하는 내게 콘텐츠를 통해 읽은 그녀의 말들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영화 핸드빌

그리고 오늘 아침, 영화나 볼까 하고 메가박스 앱을 열었다가 '정영선 조경가의 사계절 에세이'라는 부제의 영화 <땅에 쓰는 시>가 상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중의 일과가 힘들었던 탓에 집에서 그냥 쉬어야 하나? 갈등하던 참이었는데 이 영화를 발견하니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빠르게 채비하고 영화를 보러 갔고, 그 담백한 다큐를 보며 -영화를 볼 때는 극 F인 나는- 어느 구간에서는 또르르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영화를 봤다. 그 느닷없는 눈물의 이유는 지금 돌이켜 보면 '자기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만큼 진정성 있게 그 시간을 살아온 사람'에게 감동해서 였던 것 같다.


매일 일어나 자기 집의 정원을 돌보고, 해가 져야 집에 들어간다는 그녀는 정말로 소박하고도 성대한 그녀만의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여러 지역에서 자라는 자생종들이 자연스러운 아름다운으로, 제 각각 생긴 대로 피어나되 전체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모양이 되도록 그녀는 매일 조금씩 마른 잎사귀를 정리하고, 잡초를 뽑으며 정원을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새들의 지저귐을 배경음으로 정원의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드리우는 목조 테이블 앞에 앉아 자주 새로운 정원에 대한 스케치를 했다.


같은 작업에 대해 새로운 스케치를 계속해서 한다는 이야기

사계절에 꽃이 피어나는 순서, 그 모든 식물들이 자라나 만들어내는 풍경, 전체의 맥락에 잘 어울리는 콘셉트의 수종들인지, 실제로 구현 가능한지, 이 정원을 주로 활용할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을 줘야 할지... 그런 것들이 딱 떨어지는 순간까지 스케치를 하고 또 하고 한다는 이야기

병원 앞 공원을 조성할 때는

사랑하는 이들의 병간호를 하며 때때로 숨죽여 울고, 다시 눈물을 닦고 아무 일 없는 사람의 얼굴로 병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보호자들이 숨어 울 장소가 되어주고

아픈 사람과 아픈 사람을 돌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마음 앓이를 하는 간호사와 의사들이 쉬면서 기분을 환기하는 장소가 되어주고

병실에서 내내 생활하는 환자들이 창 밖의 나무를 보며, 겨울 내내 앙상해도 봄이면 새로 돋아나고 오래 푸르고 또 알록달록한 잎을 달고 있는 나무들의 생명력을 보며 희망을 주는 장소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설계했다는 이야기 등


그녀의 정원들은 단순히 예쁘고 뽐내는데 이용되는 인스타그래머블한 공간이 아니라 그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다양한 사람들을 배려한 결과물이었다. 세상에 조경가는 많지만, 그녀만큼 대단한 조경가는 또 없을 거라던 조경 사무소의 소장님(?)의 평은 이런 그녀의 공원 이용객과 그 주변 자연 등 모두를 배려하고 품는 세심한 정영선 조경가의 마음과 그것을 현실에 구현시켜내는 그녀의 탁월한 실력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때로는 현장에서 함께 일하는 기술자 분들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었지만, 결국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에 감탄해 오랜 세월 함께 일하며 이제는 너무나도 그녀를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정말 멋지게 들렸다.


얼마 전 동료와 술을 먹으며 '나는 일이 좋은데, 그냥 좋아서 몰입감 있게 매일 꾸준히 일하고 그렇게 진정성 있게 일하다 보면 어떤 결과물들은 고객들에게 인정받아 좋은 성과를 내기도 하면 좋겠다.', '일과 삶이 분리되기보다는 그냥 내 삶 속에 일, 삶 모두가 자연스럽게 존재했으면 좋겠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말에 대한 동료의 답은 '너무 이상적이지 않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영선 조경가를 비롯한 꽤 많은 분들, 즉 성공해서 세상에 그 스토리가 알려졌는데 결국 그 일의 '근원'이 단지 돈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관심과 배려, 애정'에서 기인했다는 스토리인 것을 보면 내가 지향하는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모습'또한 꿈같은 소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아주 아주 멋진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만나고, 그리고 종국에는 나도 그렇게 좋은 가치와 생각을 업을 통해 세상에 나누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선유도로 건너는 다리에서 찍은 양화 한강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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