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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Dec 22. 2022

H 언니

어쩌다 영국

H 언니를 처음 만난 것은 2016년 12월 31일, 일본 교토였다. 그해 10월, 절친들과 부산국제영화제에 놀러 갔다가 아주 우연히 미국에서 온 영화감독 S를 우리가 자주 가던 이자카야 옆자리에서 만났고, S의 일행이 한 명 두 명 점점 불어나면서 우리 테이블을 점령하고 말았다. S의 일행 중 특이한 곱슬머리 스타일을 하고 소주에 절어버린 취객이 있었는데 그가 우리 테이블에 술을 쏟고 온갖 진상을 부리는 바람에 우리는 찝찝한 마음으로 이자카야를 떠났다. 다음날 영화제 장소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우리 테이블을 침범한 그 취객이 멀쩡한 모습으로 단상에 앉아 마이크를 잡고 관객과의 소통을 하는 것을 보았다. 곱슬머리도 영화감독이었다. 잘생겨서 알아본 것은 아니고 그 희한한 머리 스타일 때문이었다. "어제 술 취했던 그 남자 아니야?" 친구와 나는 동시에 그를 알아보았다.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친구가 프랑스 영화인의 밤 인가 뭔가 하는 행사장 티켓을 갖고 있어서 맛있는 음식이나 먹을 겸 놀러 갔다가 S를 비롯한 곱슬머리 감독 일행을 다시 만났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과 술을 공짜로 먹으러 간 자리였지만 알고 보니 곱슬머리 감독은 캄보디아계 프랑스인 영화감독으로 행사의 테마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곱슬머리 감독은 2016년 그 당시에도 이미 영화계에서 핫한 젊은 감독으로 떠오르는 모양이었는데, 2022년 기준으로 그의 영화가 칸느 영화제에도 출품되고 최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화제작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암튼, S와 그 자리에서 회사 명함을 주고받았고, 그 뒤에 S가 내 회사 이메일로 연락을 먼저 하면서 서울에서 몇 번 만나다가 친구가 됐다.


그 무렵 S가 친구들과 교토 오사카 여행을 같이 간다고 해서 어쩌다 보니 나도 끼게 됐다. 사실, 지금은 어쩌다가 내가 그 여행에 끼게 됐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S가 초대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나도 가도 되냐고 물은 것인지 시작이 뭔가 애매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이상한 조합이었다. 그때의 나는 더 어리고 철이 없고 생각이 없었다. 2016년 12월 말 교토 여행 참석자는 S, 나, S의 또 다른 영화감독 친구 D 그리고 출장 겸 여행으로 일본에 온 H 언니였다. D와 H 언니는 시카고에서 나고 자란 재미 교포였고, S는 대만계 미국인이었다. (학교 다닐 때부터 S 주변에는 한국 친구들이 많아 S는 전생에 “한국 아줌마 - Korean housewife” 였을거라고 했다) 그들 셋은 국적 말고도 공통점이 있었다. H 언니는 S와 대학 동기로 10년이 넘은 친구였고, 알고 보니 D도 같은 대학 출신. 어쩌다가 나 혼자 미국 모 대학 동창회 일본 여행에 낀 격이었다.


교토의 한 호텔 로비에서 만난 H 언니의 첫인상은 꼭 패션 잡지에서 튀어나온 모델 같은 느낌이었다. 쌍꺼풀이 없는 눈, 작은 얼굴, 긴 목, 그리고 똥머리로 묶은 검은 머리에 컬러풀한 원피스.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예뻤다. S는 언니가 세계 최대 포털 사이트 G 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한다고 했다. ㄱㄱ 디자이너라니. 언니를 처음 만났지만 언니와 왠지 잘 어울릴 것 같은 직장이었다. 그렇게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만나 2017년 새해를 맞이하고 2박 3일을 같이 보냈다.


새해에 우리는 교토 근처에 있는 온천으로 갔다. S와 D는 남탕으로, H 언니와 나는 여탕으로 가 각자 시간을 보냈다. 어제 만난 사람과 같은 방에서 잠을 자고 오늘은 알몸으로 노천탕에 들어가다니. 목욕을 하면 원래 깊은 대화가 술술 나오는 법인가 보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언니 아빠가 편찮으셨던 이야기 등등 우리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공유했던 것 같다. 여행 도중에 D가 "H가 너를 막내 동생처럼 예뻐하는 것 같아"라고 말했을 때 기분이 좋았다. 언니가 없어서 그런지 언니한테 챙김 받는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짧지만 강렬한 2박 3일을 보내고 우리는 헤어졌다.


H 언니의 뒷모습. 지금봐도 간지나는 언니.


그렇게 당분간 다시 볼 일 없을 것 같은 언니를 2017년 7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시 만났다. 그해 6월 7년간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고 친구들도 만날 겸 별 계획 없이 약 3주간 미국 여행을 떠났는데 그때 H 언니가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것이 생각나 언니에게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H 언니는 자기 집에 와서 며칠 지내도 된다며 주소를 공유했다. 정말..?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때 나는 지금보다 어리고 철이 없고 생각이 없었다. 언니 집에 3박 4일 머무르기 위해 인천-시카고-채플힐-워싱턴 DC- 샌프란시스코를 놀러 가는 여행으로 수정했다.


샌프란시스코 H 언니의 집은 꼭 킨포크 잡지에 나오는 것처럼 군더더기 없는 화이트 톤의 아파트였다. 스튜디오 아파트였지만 작은 방 세 개를 합쳐놓은 것 같은 크기에 커다란 화장실이 꼭 미드에 나오는 성공한 여성의 집 같았다. 언니는 나는 손님이니까 침대에서 자야 한다며 자기  침대를 내주고, 자기는 에어 매트리스에서 잤다. 언니 집에서 처음 잔 날,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나 완전 꿀잠 잤어. 언니 침대 정말 좋은 것 같아." 언니는 그때 일본 여행을 하면서 한 호텔에서 묵었는데 매트리스가 너무 좋아서 브랜드가 뭔지 물어본 뒤 똑같은 것을 샀다고 했다. 그 좋은 매트리스를 내가 3일간 차지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날씨가 쌀쌀한지 모르고 얇은 옷만 잔뜩 챙겨 온 나에게 언니는 자기 옷장을 열어 보여주며 따뜻한 옷을 꺼내 입으라고 했다.  언니 옷장에는 COS 스타일 옷이 많았다. 나는 언니의 회색 맨투맨 셔츠를 꺼내서 입었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 미니멀리스트일 것 같은 H 언니에게 어떤 선물을 줄까 하다가 언니가 내 인스타에 올렸던 춤추는 짝퉁 미니언즈 인형에 열광했던 것이 생각났다. 높이가 20cm 정도 되는 부피가 꽤 되는 플라스틱 인형이었다.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 S를 만났을 때 춤추는 미니언즈를 언니에게 선물할 거라고 하니까 S는 "H는 이사를 자주 다녀서 그렇게 큰 선물 주면 별로 안 좋아할 거야"라며 난색을 표했다. 흥. 나는 그의 조언을 듣지 않고, 미니언즈를 포장해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들고 갔고, 킨포크 잡지풍 아파트에 사는 언니에게 선물했다. 언니는 웃으면서 좋아했다.


언니는 하루 휴가를 내고 차를 렌트해 샌프란시스코 명소를 구경시켜 줬다. 상사한테 한국에서 동생이 놀러 왔다고 하니 하루 휴가를 쓰라고 권했다며 빨간 SUV를 빌려와 골든게이트 브리지와 내가 꼭 가고 싶어 했던 Legion of Honor 뮤지엄에 데려가 꾸안꾸 사진을 찍어줬다.


샌프란시스코.
언니 회사에서 본 풍경.
차 없이 가기 힘들었던 Legion of Honor


그렇게 샌프란시스코에서 3박 4일을 보내고 떠나기 전날, H 언니가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런던 교통카드인 오이스터 카드와 파운드였다. 언니는 2년간 런던에 파견 가서 일했는데 그때 쓰던 교통카드와 남은 돈이라며 이제 자기에겐 쓸모없으니 두 달 뒤 영국에 가면 유용하게 쓰라고 했다. 친언니가 있으면 나를 이렇게 챙겨줬을까. 언니는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걸까. 언니 앞에서는 울지 않았지만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혼자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여러 감정이 몰려와서 눈물이 났다.


또 만날 일이 당분간 없을줄 알았는데, 2018월 5월 H 언니를 다시 만났다. 언니가 런던으로 출장 오면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고, 마침 수업이 없었던 나는 브리스톨에서 버스를 타고 런던으로 갔다. 언니는 출장으로 와 회사가 숙소를 예약해줬다며 좋은 호텔이니 며칠 와서 같이 지내면서 런던에서 같이 놀자고 했다. 정확한 호텔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Bank역 근처에 있는 으리으리한 호텔이었다. 아무도 내가 가난한 유학생인 것을 모르지만 괜히 기죽는 그런 호텔... 언니가 호텔 꼭대기에 라운지가 있다며 가서 맛있는 점심을 먹자고 했다. 라운지를 구경하고 있는데 직원이 우리에게 와서 공손한 영어로 여기는 "white card"  소지자만 식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일단 카드 이름에 white가 들어간 것이 영 거슬렸는지 green card를 갖고 있던 언니는 따지듯 물었다. "How can I get the white card?" 직원은 스탠더드 룸에서 디럭스 룸으로 업그레이드하면 화이트 카드를 가질 수 있다고 했다.


어마어마한 런던의 호텔.

"언니, 나 진짜 괜찮아. 우리 라운지 말고 다른 데서 밥 먹자." 언니는 거절했다. "아니야. 우리는 white card로 업그레이드해서 내일 저기 라운지에서 밥 먹을 거야." 언니는 영국의 계급 문화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카드 이름에도 화이트를 끼어넣다니. "너 라운지 둘러봤어? 거기 동양인은 한 명도 없었잖아. 다 부자 백인들. 라운지에 일하는 직원들은 다 영국인이 아니야. 그 사람들 영어 들어보면 알 수 있어. 아시안 여자들도 이런 데서 밥 먹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해." 언니가 미국에서 어떤 일을 겪으며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언니는 단단히 화가 난 듯했다. 언니는 미국인의 영어로 프런트 데스크와 대화한 끝에 결국 디럭스 룸으로 업그레이드해서 화이트 카드를 받아냈다. "자, 우리 라운지 가자." 언니가 영국의 계급 문화와의 싸움에서 이기면서 우리는 라운지에서 사진을 찍으며 밥을 먹었다.


언니와 2박 3일을 같이 런던에서 보내면서 언니가 한 말이 아직도 생각난다. 미혼이었던 언니는 나에게 "앞으로 결혼할 사람을 선택할 땐 너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봐야 해. 만약 이 남자가 '내 딸'과 결혼한다면 어떨까? 그렇게 생각해 봐. 누가 자기 딸에게 쓰레기 같은 놈을 주고 싶겠어." 지금 생각해도 아주 현명한 조언이다. 결혼을 몇 주 앞둔 지금 펑씨같은 남자가 내 미래의 딸과 결혼하다고 가정하면 나는 행복할 것 같다. 좋은 남자이니까. H 언니는 현자였다. 2박 3일 런던 여행 후 나와 헤어질 때 뱅크역에서 언니는 내 손에 50파운드를 쥐어줬다. 나의 가난한 유학 생활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언니는 그 돈으로 "나중에 맛있는 거 사 먹으라"라고 했다.


언니와 아이스크림



오늘 혼자서 산책하는데 2018년 5월 이후로 만난 적이 없는 H 언니가 갑자기 생각났다. 스쳐간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내가 힘들 때 힘이 돼준 언니가 참 고마웠다. 친언니가 없는 나에게 처음으로 언니 같은 존재가 돼준 H 언니. 언니는 나에게 왜 그렇게 잘해준 것일까. 내가 너무 가난할 때 만나 언니에게 받기만 했는데 이제 은혜를 갚고 싶다. 언니가 홍콩에 놀러 왔으면 좋겠다. 새해를 맞이해 오랜만에 H 언니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연락해 봐야겠다. 언니,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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