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인혁의 리얼월드 Jan 23. 2017

인연이 만들어낸 큰 필연

스탠포드 감옥실험의 필립 짐바르도 박사를 만나기까지

2012년의 오늘이었습니다. 호기롭게 회사를 박차고 나와 내가 가진 것으로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노라 했던 다짐이 여전히 가슴에 새겨져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 즈음해서 연일 방송에선 심각한 교내 폭력과 그로 인한 자살, 그리고 익명이라는 이름으로 최진실씨를 비롯해서 불특정 다수에 대한 도를 넘는 폭력과 조롱이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런 문제의 대책? 각종 전문가와 정부는 학교내 경찰의 전진 배치나 일벌백계와 같은 처벌강화 정책을 내세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크게 잘못된 접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도 내가 만약 가해자의 입장이라면, 피해자가 절대로 경찰이나 어른들에게 알리지 않도록 더욱 위협을 가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가리는 것이지 근원적인 접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문득 스탠포드 감옥 실험의 필립 짐바르도 박사님이 생각났습니다. 죄수와 간수 실험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학생들을 죄수와 간수로 구분하여 역할극을 시켰더니 상황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이 상황에 완전히 몰입하여 그 모의감옥은 심각한 폭력 사태에 빠졌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트라우마를 남기며 중지되었던 바로 그 실험이었습니다. 
짐바르도 박사가 그때 깨달은 것은, 본인은 관찰자였지만 결국 그 상황 자체가 이런 폭력을 용인하는 권위를 부여한 것과 같은 효과를 일으켜 사태를 증폭시킨 핵심 책임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때 그가 내린 결론은 법 없이 살 사람이라 할지라도 '상황의 힘'앞에선 무력해질 수 있음에 관한 것으로 이른바 사회심리학을 시작한 역사적인 계기였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사회심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헌신했고 그때 저지른 실험의 결과를 반성하며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는 수많은 프로젝트를 자비로 지금까지도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참고로 상황/사회 심리학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은 그의 TED강연을 보거나 저서 루시퍼 이펙트라는 책을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돌아와서,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 상황에 어떻게든 힘이 되고 싶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막막했습니다. 고민 끝에 짐바르도 박사에게 한번 상의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일면 안식도 없고, 단지 그의 책을 읽었고 TED강연을 보며 감명받은 한명의 젊은 친구의 객기였을까요. 다짜고짜 그분의 연구실 홈페이지를 방문해 거기에 적혀 있는 그분의 이메일 주소를 찾아내고선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한국의 상황들을 설명하고 관련 기사들을 요약해서 보여드렸습니다. 사실 답장을 기대하진 않았습니다. 사회심리학의 거장이자 전설인 사람이 나의 메일에 답장을 해 줄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나 그분은 저를 여러차례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제 메일에 완전 충격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회신을 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저랑 스카이프로 채팅을 하자고 제안을 줍니다.  
 
we need to skype to discuss this problem and related issues in detail my assistant will connect with you re a good time
Ciao,
Phil Zimbardo 
 
영어가 서투른터라 나눌 이야기를 미리 문장도 만들어두고 관련 자료도 더 스터디도 하면서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당일. 왠걸 화상채팅이 걸려옵니다. 터걱 큰일이다! 막 세살짜리 아이가 목에 기어올라와서 안 떨어질려고 바둥바둥했지만 에잇 모르겠다 하고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사진상으론 상당히 권위있고 심지어 무서운 느낌의 외모였지만 실제로는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친절하고 자상한 분이었습니다. 아이가 와중에 똥도 싸서 기저귀도 갈아주고 난리도 아니었지만 손자보듯 즐거이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더욱 심각해진 그는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다시 회신이 왔습니다. 
 
메일 내용은 역시나 더욱 진전된 것이었습니다. 주요 내용을 전부 대문자로 강하게 강조하며 이것은 자살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한 완전히 사회적 타살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제 이야기와 관련해서 관련자료를 더 수집하고 싶고, TEDxSeoul을 비롯한 여러 자리에, 그리고 학교와 기업의 리더들을 만나고 싶다며 저에게 자리를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진행하는 Heroic Imagination Program을 함께 하고 싶다는 제안도 주었습니다.  
 
INHYUK
Please send me some Korean press clippings with notice of student suicides and violence-- to make slides of it
in case I meet with Koreans in the US
also any official statistics on these problems.
IT IS A MAJOR SYSTEMIC PROBLEM THAT NEEDS CORRECTION TOP DOWN
HIGH SCHOOLS, COLLEGES AND BUSINESSES NEED MAJOR CHANGES IN FOCUSING AWAY FROM
GRADES AND STUDENTS AS "STUDY MACHINES" TO CREATING WELL ROUNDED CITIZENS WHO CARE ABOUT OTHERS, THE COMMUNITY AND THE ENVIRONMENT.
IT NEEDS TO CREATE A MORE CIVIL SOCIETY WITH COMPASSION AND HEROISM AS GOALS
KOREA NEEDS OUR HEROIC IMAGINATION PROGRAMS
SEE OUR WEB BELOW
I MIGHT BE ABLE TO ATTEND YOUR KOREA TED NEXT YEAR BUT ONLY IF I CAN MEET WITH ACADEMIC AND BUSINESS LEADERS ABOUT PLANNING MAJOR CHANGES TOGETHER
-- 
Ciao,
Phil Zimbardo 
 
그 뒤에 있었던 여러가지 일들은 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면 좋겠습니다. 다만 이렇게 장황하게 글을 쓰는 이유는, 세계 최고의 석학이자 권위자인 박사님은 일개 젊은 친구의 메일을 지나치지 않고 다가와 주셨고 자신의 소명에 진심으로 마음을 쓰고 행동을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그분을 만나러 미국까지 건너가서 3시간이 넘도록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할 수 있는 지점을 모색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 만남이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큰 인연이었습니다. 80대가 넘은 노인으로 지팡이를 짚고서 나타난 모습에 또다시 놀랐습니다. 그는 다시금 한국의 교육이 이 지경까지 온 것에 대해서 그는 대단히 안타까워하며  이 시스템의 문제를 어느 한쪽 당사자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풀 수 있어야 한다며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한국에 꼭 불러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불편한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이 반짝이는 모습에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외국인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스스로 권위를 내려놓고 인연이 닿은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 자신이 가진 것을 상대에게 기꺼이 나눠주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단지 제가 그렇게 또다시 세상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제 가슴에 영원히 새겨졌던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다음날 짐바르도 박사는 또다시 메일을 보냈습니다. 
 
'I hope there is KARMA between us"
우리 사이에 카르마가 있기를 바랍니다. 
 
작은 인연은 이렇듯 이억만리 떨어진 사람과의 경이로운 연결을 만들어낼 정도로 큰 힘이었던 것입니다.  
 
페이스북이 '몇년전의 오늘' 을 통해 제게 이 소중했던 시간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저도 다짐하게 됩니다. 세상이 나에게 다가와 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선한 영향이 될 수 있도록 인연이 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자.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든. 인연이 만들어낼 거대한 뜻을 따르자. 
 
제가 좀 더 다가가겠습니다. 
저를 좀 더 사용하세요. 
제가 여러분을 찾을 수 없다 하더라도 제가 만날 수 있게 다가와 주세요.
인연의 필연을 만들어봐요.

작가의 이전글 니가 생각하는걸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