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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재형 딴짓마스터 Mar 25. 2017

왜 깜빡이 안 넣고 끼어들어

아무리 경쟁이 필수라지만

첫 해외여행은 이성만으로 통제할 수 없는 환상을 심어준다. 언제 다시 떠나도 최고의 순간일 거라는 막연하지만 설레는 기대를 품게 한다. 내게는 미국이 그런 곳이다. 미국 영화를 보면 참 자주 나오는 장면이 있다. 광활한 평야를 가로지르는 고속도로와 그 길을 달리는 자동차. 석양까지 내려앉는다면 완벽한 할리우드 발 클리셰다. 영화의 오프닝이든 엔딩이든 중간광고 직전이든. 요즘보다는 옛날 영화, 그리고 빈티지 오픈카와 참 잘 어울렸던 장면이다.


시카고에서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까지 3945km. 미국의 어머니 도로 ‘루트 66’은 그래서 한 번쯤 달려보고 싶은 길이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 애니메이션 <카>를 비롯해 여러 작품의 배경이 된 곳이다. 인터넷을 두드려보니 서울에서 부산까지 최단 경로는 394km. 딱 10배에 몇 걸음 더 걸으면 닿는 긴 거리를 막힌다는 걱정 없이 달린다는 상상은 얼마나 즐거울지. 막상 달려보면 지루해서 졸음운전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적당한 변수가 주는 자극은 언제나 환영이다.


그녀를 옆에 태우고 달릴 때 맹수처럼 운전하는 나는 순한 양이 된다. 잔잔한 호수 같은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당신 옆에서는 졸졸졸 시냇물이 되는 편이 좋다. 하지만 여기는 루트 66이 아니어서 이따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게 되는데, 가장 참기 어려운 케이스는 깜빡이 켜지도 않고 껴드는 운전자를 볼 때다. 흥분을 최대한 속으로 삭이지만 시냇물이 범람하는 건 한순간이다.


우리나라 고속도로도 날마다 막히지는 않겠지만 내가 사는 곳은 서울. 어느 종교 성자가 와도 예민 해질 법한 도시다. 도로도 빡빡하고 경쟁적이다. 골목도 동네 큰 길도 한강을 따라가는 자동차 전용도로까지도. 정해진 신호, 적당한 속도로 달린다면 평화롭겠지만 모두가 같은 마음일 순 없다.


끼어들기를 할 때 깜빡이를 켜는 건 매너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운전할 때 발생하는 끼어들기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목적지로 가기 위해 방향 전환을 해야만 할 때’다. 좌회전해야 해서 좌회전 차선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다음은 ‘목적지로 빨리 가기 위해 좌우 차선을 침범할 때’인데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부류다.


얄팍한 경험으로 낸 통계지만 이런 운전자들이 그렇게 깜빡이를 안 켠다.


지난 겨울 우리는 편법 사회의 민낯을 봤다. 


기회의 문이 좁을 때 새치기는 더 큰 혼란을 야기한다. 실력은 없지만 ‘빽’만 믿고 좋은 학교에 입학했던 어떤 여자만의 일은 아닐 거다. 이 세상의 정유라는 한 명이 아니다. 공직자들의 인사 청탁이나 군대 보직 이동은 이미 익숙하다. 교사 채용 면접장에 아버지가 면접관으로 참석한 일도 있었다. 그 사람은 딸이 지원한 학교 교장이었다. 


깜빡이는 ‘잠시 당신 앞에 서겠습니다’하고 알려주는 최소한의 예의다. 도로에서는 지금 앞으로 끼어들어도 교통 상황에 따라, 운전 실력에 따라 언제든 앞서갈 수 있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깜빡이 한번 켜는 사람이 없다. 아니, 깜빡이 켤 생각이 있었다면 애초에 새치기 안 했을 사람이지 싶다.


안 걸리면 되지
나만 아니면 돼
돈도 실력이야


기회는 한정적이고 경쟁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경쟁이 필연적이라고 편법도 당연하다 여겨서는 곤란하다. 성과는 그만한 노력이 있을 때 인정받고 정당화된다. 그런 사회가 건강한 것은 당연하다.


우사인 볼트, 2000년대 이후 가장 원더풀 하다고 생각하는 스포츠 스타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 육상 100m 결승에서 9초 69를 기록(볼트가 세운 세계 신기록은 9초 58)하며 골든보이가 됐다. 그가 라이벌을 제치고 칼 루이스와 ‘육상 영웅’ 타이틀을 다투게 된 데는 100m의 압도적 경기력과 200m, 400m를 동시 석권했기 때문이다.


볼트는 분명 천재적이지만 가진 것만으로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는 선수는 아니었다. 단거리 육상 선수의 이상적 체격인 170cm 중후반보다 20cm나 큰 볼트는 공기 저항을 많이 받는다. 맞바람 한 번에 기록이 달라지는 100m에서 큰 페널티다.


키가 크다 보니 척추 측만증도 갖고 있다. 커브를 돌아야 하는 중거리 종목에서 안정적으로 균형 잡기 어려운 신체 조건이다. 그래도 볼트는 노력 끝에 최상의 주법을 찾았다.


반짝 스타로 남았을지 모를 그는 비로소 슈퍼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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