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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재형 딴짓마스터 Jul 14. 2017

비 오는 날의 수국화

사진가의 도시 #5

수국, 부산 태종사. 2017

분명 부케였습니다. 이 자태 그대로 신부의 손에 얹혀도 좋을, 연둣빛을 품은 새하얀 수국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목표는 달성했습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수국이었고 마침내 만났으니까요. 하지만 때아닌 빗줄기가 자꾸 머리를 때립니다. 만개한 꽃을 보겠다는데 하필 날씨 한번 얄궂네요. 운도 참 없습니다.

수국, 부산 태종사. 2017

생각해보면 저는 가위바위보도 약하고, 'OX' 퀴즈는 쥐약입니다. 여행지에 비가 올 확률이 반반이라면 전 오늘도 50%의 함정에 빠져들었습니다. 내리는 비를 멈출 수 없으니 손에 든 카메라를 꼭 쥐어봅니다. 그리고 다시 바라본 꽃잎은 빗물을 머금어 한껏 진득해진 햇살을 받아 반짝입니다. 아, 그렇구나. 문득 깨닫습니다. 비 오는 날의 수국도 제법 괜찮구나.

수국, 부산 태종사. 2017
수국, 부산 태종사. 2017

어릴 적 시골집에 수국이 있었어요. 워낙 오래전이라 색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요. 어쩌면 핑계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 얼굴과 물체의 색은 또렷이 기억하는 편이거든요. 제가 기억 못 한다면, 미안하지만 그 수국이 제게 중요하지 않았던 탓이겠죠. 어린 저는 수국을 보고 이상하다고 느꼈습니다. '정말 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눈에 비친 수국은 그동안 알고 있던 꽃의 형태를 아득히 벗어나 있었습니다. 꽃이라고 하면 장미나 튤립처럼 크게 한 송이 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어쨌든 꽃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없었으니, 그 후로도 수국은 제 마음속 랭킹에서 단 한 번도 상위권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수국, 부산 태종사. 2017
수국, 부산 태종사. 2017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수국을 좋아해"라고 말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꿈을 이야기할 때 마치 어린 소녀의 눈망울처럼 빛나는 사람이었습니다. 작은 꽃봉오리를 하나씩 틔워 큰 꽃을 이루는 수국처럼,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 한 걸음씩 내딛는 그런 사람이었죠. 하나만 있어도 꽃다발 같아 바라보기만 해도 가득 찬 기분이 들어. 색깔이 다양해 풍성하잖아. 칭찬 릴레이에 공감한 탓인지 그 사람 덕분인지 저도 그만 수국을 톺아보게 됐습니다.

수국, 부산 태종사. 2017
수국, 부산 태종사. 2017

수국은 뿌리내린 땅의 산성도에 따라 색이 바뀐다고 하죠? 산성 토양에서 파랗게, 염기성 토양에서 빨갛게 피어납니다. 두 가지였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을, 연보라, 연분홍, 흰색, 베이지, 와인색까지 색깔 한번 다양하더군요. 오락가락하는 그 마음을 알아챘는지 수국에 내려진 꽃말은 변덕, 바람둥이입니다.


수국, 부산 태종사. 2017

이상합니다. 색이 자주 변한다고 해서 변덕쟁이라고, 바람둥이라고 단정 짓는 건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얄팍한 판단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저도 한결같음이 좋아요. 자기 가치관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는 것, 매력적이죠. 하지만 사하라와 알래스카의 생활이 같을 수 없듯이 새로운 장소에 적응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맞춰 나가려 노력하는 것은 그 자체로 현명합니다. 변화에 적응하기, 누구나 경험하는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수국, 부산 태종사. 2017

그래서 이 꽃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존재의 매력은 그가 겪은 다양한 경험과 쌓여온 생각, 가치관으로 만들어지니까요. 작은 꽃봉오리가 하나씩 터져 만드는 수국의 끝은 그야말로 창대합니다. 그 어떤 꽃과도 감히 비교하기 어렵죠. 마침 빗방울이 꽃잎에 스며들어 숨어 있던 진짜 색도 드러났습니다. 수국은 파스텔이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는데 수묵채색화처럼 진득하면서도 맑은 매력이 있었네요. 비가 내려 야속하다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가봅니다.


아, 드라이플라워로 남겨도 꽤 아름답습니다. 이쯤 되면 수국이야말로 흔들리지 않는 아름다움, 변함없는 사랑을 몸 바쳐 담은 꽃 아닐까요?


'사진가의 도시'는 제가 사는 매력적인 도시 서울의 순간과 여행하면서 만난, 만나게 될 다양한 공간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사진가의 도시'는 어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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