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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홉이든 HOPEDEN Nov 18. 2015

미션 임파서블 : 카카오를 지켜라

콜롬비아 Colombia

네이버 블로그로 이전되었습니다. 브런치에서는 더 이상 업데이트 되지 않습니다.

http://blog.naver.com/hopedenkorea


글, 사진 : 저니, 스테이시


우프란? 
WWOOF(World-Wide Opportunities on Organic Farms)는 유기농가와 자원봉사자를 연결하는 세계적인 네트워크로 금전적인 교환이 없는 신뢰를 바탕으로 그들의 문화교류와 교육의 기회를 넓히고 자연과 공존하며 지속가능한 글로벌 사회를 만드는 운동(프로그램)입니다.


기간 : 2015.9.23 - 2015.10.6
작물 : 카카오 
지역 : 엘 카르멘 데 추쿠리, El Carmen de Chucuri (콜롬비아 산탄데르, Colombia Santader)


남쪽 국경을 넘어 에콰도르 땅에 닿자 바나나 플랜테이션 농장이 끝없이 펼쳐졌다. 탐스럽게 열린 바나나를 보면서 든 생각은 우리가 우핑 할 만한 곳이 있을까였다. 역시나 우프에 가입한 농장은 작물 구분할 것 없이 몇 되지 않았고 모두 연락을 취했지만 소식이 없었다. 단 한 곳. 회신이 왔지만 그마저 우릴 실망시켰다. 생태림 보호란 미명 아래 참가비를 언급한 것. 스테이시는 단호했다. 곧장 협회에 신고하여 강력히 조치할 것을 요구했다. 동시에 미래 농장을 떠올리면서 우리 스스로도 다시 한 번 우프 정신을 일깨웠다. 


우핑은 교환이다. 

농장일을 돕는 대신 호스트로부터 숙식과 체험 기회를 제공받을 뿐. 

그 어떤 경우에도 돈이 요구될 수 없다. 


에콰도르에서 인연이 닿지 않은 우핑. 콜롬비아로 무대를 넓혔고 카카오 농장에서 반가운 회신이 왔다. '찾아 오시는 길’이 자세히 쓰여 있었는데 얼핏 봐도 오지 마을이 분명했다.        




카카오 농장을  찾아라! 


오직 우핑을 위해서 콜롬비아로 향했다.

버스를 갈아타고 또 갈아타길 30시간. 2박 3일에 걸쳐 총 1,800 킬로미터를 이동했다. 기후도 달라져 다시 더위에 적응해야 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작은 읍내 엘 카르멘 데 추쿠리(El Carmen de Chucuri). 호스트 노부모 댁에 자전거를 맡기고, 두메 산골행 마지막 버스에 올랐다. 노후한 버스는 승객보다 온갖 짐들로 붐볐다. 검정 비닐로 꽁꽁 싸맨 보따리, 크고 작은 상자들, 그리고 마대자루엔 뭐가 담겼는지 짐을 싣는 운전기사의 얼굴에 땀이 줄줄 흘렀다.     


비포장 산길. 버스가 다니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없는데  중간중간 버스가 멈췄다. 그때마다 기사는 짐들을 하나 둘 내리고, 새 짐을 실어 올리기도 했다. 운전, 요금 계산, 택배까지 겸하는 멀티플레이어. 고단할 법한데도 그의 밝은 표정에서 정겨움이 묻어났다. 그나 저나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걸까? 슬슬 엉덩이가 짓물러 오는 것 같다. 


“한국인이죠? 저랑 같이 가시면 돼요.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한 무리 학생이 버스에 오르더니  그중 한 소녀가 아는 체를 한다. 호스트의 큰 딸 사이라(Zayra).

길잡이를 만나 맘이 놓인 우리는 차창 밖 카카오 구경을 실컷 하였다. 잎도 가지도 없는 몸통 줄기에 ‘뿅'하고 매달린 열매는 볼 때마다 신기했다. 꼭 접착제로 붙여놓은 것 같다. 가도 가도 카카오 나무. 산 전체가 거대한 카카오 밭이었다. 


이윽고 최종 목적지 온두라스 바호(Honduras Bajo)에 도착했다. 종점으로 불리는 그곳, 낮은 지붕 허름한 집, 그 앞 자그만 공터에 후진 주차를 하였다. 긴 나무 의자가 대합실의 전부인 그곳에서 장화를 갈아 신은 사이라는 따라오라며 앞서 걸었다. 비 온 후라 땅이 많이 질었다. 저만치 앞선 길잡이를 뒤로 슬리퍼 차림의 우리는 자꾸만 걸음이 뒤쳐졌다. 그렇게 일이십 분이 지나고 드디어 농장이 보였다. 


“보스크 데 카카오 야리궤스(Bosques de Cacao Yariguies)”


해안이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대륙 내부의 땅이란 뜻의 ‘오지’. 먼 길 온 보람이 있었다. 무선 인터넷과 통신으로부터 해방을 맞았다. 물 좋고 공기 맑고, 뭐든 잘 자랄 것 같은 이런 곳에서 우핑이라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즐거운 나날이 될 거야!


야리궤스 카카오의 숲



일을 적당히 해야지 (1)


호스트의 지침대로 새벽 일찍 눈을 떴다. 

아이들과 호스트 부부는 이미 꼭두새벽에 집을 나갔고 켈리(Kelly)란 아가씨가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마당 앞에 앉아서 시원한 아침 공기를 맡으며 산 위로 떠오는 해를 바라보았다. 


“낮엔 엄청 덥겠는걸? 하루의 시작이 이를  수밖에 없겠다.
  무슨 일 주려나? 장화가 필요할 것 같은데, 어디 신을 게 있나 찾아보고 올게"  


첫 임무가 떨어졌다. 그것은 저니의 예감대로 장화가 꼭 필요한 외양간 청소! 

일곱 마리의 소가 생활하는 공간. 그다지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냄새도 참을 만한 것 같은데 저니는 버프(싸이클링용 마스크)를 쓰고서도 코 막는 시늉을 한다. 쑥색의 소 배설물을 치우면서 스테이시는 어렴풋한 옛일이 떠오른다.   


“어릴 적에 우리 할아버지 가요, 제 코가 납작해서 인물이 안 난다고 맨날 잡아 당겨주셨거든요. 한 날은 뒤안에 가면 빵떡 있으니 가보라고 하시지 뭐예요. 그땐 빵이 귀했잖아요, 빵 먹을 생각에 신나서 뛰어가 보니 소똥이 철퍼덕 널려있는 거예요. 빵은 없고 소똥 때문에 미끄러질  뻔했다고 볼멘소리를 하니까 할아버지는 그게 빵떡 아니고 뭐냐며 손녀 놀려먹곤 하셨는데. 여기건 빵떡이 아니고 쑥떡이네요”   


저니는 잡아당겨서 높아졌다는 코 얘기가 재밌어 스테이시의 코를 빤히 쳐다보았다.

날이 더워지고 있었다. 목이 탄다. 일단 청소를 끝냈으니 시원한 물과 그늘이 있는 집으로 내려가서 좀 쉬어야겠다. 첫날부터 스테이시는 말이 많다.  


“저니 여보 그거 알아요? 소는 위도 네 개, 젖도 네 개"
“옹 그래? 희한하긴 해. 풀만 먹고 어떻게 저렇게 클 수 있는지. 우유도 만들고 말이야. 참 신기한 동물이야."


작업을 마무리할 차례. 맨들하게 드러난 시멘트 바닥에 톱밥을 도톰하게 깔았다. 시간이 걸리긴 해도 별로 힘들 게 없는 일인데 스테이시가 자꾸 쉬자고 한다. 한번 시작하면 늘 몰아 부치듯 하던 그녀. 전에 없던 일이라 어디 몸이 안 좋은 가하며 저니는 눈치를 살폈다. 


스테이시가 쉬자는 데는 사연이 있다. 지난해 뉴질랜드 우핑 때였던가. 일을 너무 열심히 하기만 하는 스테이시를 보며 저니가 한마디 쏘아붙였다. 


'당신같이 일 하다가는 금방 몸살 나겠어. 뭐든 간에 하루만 하고 끝낼 사람처럼 일을 하느냐고!  
혼자야  상관없지만 같이 하는 사람도 좀 생각해야지. 나중에 농장 하면 일꾼도 그렇게 부려먹을 거냐고.'


다소 충격이기까지 한 그 말을 마음에 새겨두었던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녀의 여유 부리는 광경은 지금까지 저니가 본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었다. 오전 시간은 우핑. 오후 시간은 자유. 우리가 좋아하는 시간 분배. 주어진 일을 주어진 시간 안에  나눠하는 것. 하루에 다 못하면 내일로 나누면 그만이다.   


마무리만 남았다. 수레에 톱밥을 꾹꾹 눌러 담으며 스테이시를 슬쩍 떠보는 저니. 


“나중에 소 키울 수 있겠어? 한국 돌아가면 아무리 채식을 한다지만 통소비라면 얘기가 다르지. 암놈 수놈 두 마리는 있어야 새끼도 낳고 우유도 좀 얻어 먹고 그럴 건데. 이렇게 풀 먹이려면 넓은 땅이 있어야 할 텐데…도대체 내가 얼마나 벌어야 하는 거야? 캬캬"


남편이 돈 다 벌어주겠다는 얘기 같아 스테이시는 그저 기분이 좋았다. 


보기 좋게 톱밥이 깔린 외양간을 나오며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표시 나는 일은 보람이 더욱 크다. 소들도 새 단장한 집이 맘에 들어야 할 텐데.


소똥을 치우고 톱밥을 깔고 있는 스테이시



충실한 일꾼들


바이올린 연습도 하고 밀린 여행기도 손보고, 한가로운 주말이 지났다. 전지 가위와 그물 자루를 하나씩 챙겨 들고 고대하던 카카오 밭으로 향했다. 비가 자주 와서  군데군데 장화 신은 발이 쑥쑥 빠졌다. 철망 사이를 조심히 통과해 드디어 카카오 밭에 발을 들여놓았다. 잘린 곁가지와 떨어진 잎이 몇 년간 쌓인 건지 땅이 푹신 푹신하다. 


마에스트로 프레디(Fredy)의 감독 아래 일을 익혀 나갔다. 

잘 익은 열매는 따서 자루에 넣고, 썩거나 상한 것은 잘라냈다. 작은 건 바닥에 버려도 표가 안 나지만, 큼지막한 건 따로 모아 처분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 그것만 하는 일꾼이 따로 있단 걸 이후에 알게 되었으므로. 기형적으로 생긴 곁가지를 잘라내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자른 가지도 속 시원하게 땅에 던져 버리면 끝. 노랗게 빨갛게 물든 예쁜 카카오 열매. 색도 색이지만, 큼지막한 것이 수확하는 맛이 있다. 큰 것은 예닐곱 개만 담아도 자루가 무거워 자주 비우러 가야 한다. 


떨어진 낙엽 사이로 개미들이  들락날락 바쁘다. 살짝 잎사귀를 들어봤더니 하얀 개미 알이 소복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스테이시는 카카오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것들에게 몹쓸 짓을 하다가 곧 그만두는데, 많아도 너무 많아서다. 무슨 병충해라도 발생한 게 아닌가 해서 마에스트로에게 물었다. 스페인어 사전에 의지해 여러 번 되물어 얻은 답은 이런 의미였던 것 같다.


“그들은 아주 충실한 일꾼입니다. 땅에 떨어진 많은 나뭇잎과 썩은 열매를 처리하는 일도, 부패한 물질을 토양과 잘 섞어주는 일도 바로 곤충과 벌레들이지요"


시골에서 자란 스테이시도 그런 자연 상태의 생태 환경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밟고 있는 땅 속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 지렁이와 다양한 미생물의 활동을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닌데,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본인의 무지를 반성하며 다시 하던 일에 몰두하였다. 


한 번 일에 빠지면 주변을 살필 줄 모르는 그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아 따가워, 아 따가워!"


본능적으로 도망쳐 나왔다. 벌인지 개미인지, 쏘인 팔뚝이 주사 맞은 것처럼 우리하게 아파왔다. 도대체 뭐였을까. 다시 돌아가서 조심히 살폈다. 말벌! 카카오 열매보다도 큰 집을 지었다. 고놈들 단단히도 지었네. 미안해, 내가 공격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감상에 빠진 그녀 정말 못 말린다. 


이삼일 지나자 벌에 쏘인 팔이 땡땡하게 부어올랐다.

마에스트로를 따라 전전날 모아둔 카카오 무덤 앞에 둘러 앉았다. 마에스트로가 낫 하나로 ‘탁, 탁, 탁탁!’ 하자, 열매 깍지가 쩍 하고 벌어졌다. 마체타(기다랗고 큰 일자 모양의 낫)는 페루에서 처음 봤는데 이곳에서도 가장 유용하게 쓰이는 연장이다. 웬만한 과일이 달듯이 카카오 콩을 둘러싼 하얀 과육은 달다. 사탕 같지만 단물만 빨아 먹고 보랏빛 콩은 뱉버렸다. 이것이 초콜릿 원료라는 거군. 떫기만 하고 이 열매가 초콜릿의 원료가 된다고는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나무통에서 카카오 콩이 미생물 발효를 거치는 동안 여러 유효 성분이 생긴다고 했다. 하루가 지나고 하얀 과육이 점차 없어지고 아몬드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며칠 더 지나고 그 많던 과육을 누가 다 먹어치운 것일까. 연일 이어진 비 때문에 발효가 더디어 우리는 건조 과정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특유의 관찰력 덕분에 건조장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붕과 천장 사이에 도르래. 뭐에 쓰는 물건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곧 알 수 있었다. 카카오 건조를 위한 것이다. 지혜롭다. 해질녘, 우천 시 지붕을 여닫는 개폐식 구조. 탁월한 발상이다. 


이것이 카카오다!


한 번 쏘이면 뻐근하게 아프다



오지마을에서 배운 교훈

 

사이라가 윗마을 버스 종점에 택배 물건 찾으러 간다길래  따라나섰다. 무슨 기계를 가지러 간다는데 알고 보니 초콜릿 만들 때 쓰는 분쇄기의 작은 부품이었다. 물건을 찾고 돌아오는 길. 언덕에서 발아래 평화로운 농장을 내려다보며, 스테이시가 어설픈 스페인어로 물었다. 


“사이라, 참 좋은 데 산다. 나중에 크면 도시로 갈 생각이야?"
“도시에서 살고 싶긴 한데 아직 모르겠어요. 스테이시, 언덕 내려가면 이제 신호 끊기니까, 여기서 우리 이거나 좀 보고 가요. 헤헷" 


뮤직 비디오를 보고 가자며 핸드폰 화면을 보인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평범함  열두 살 소녀. 그녀가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했던 것처럼, 부모 등에 떠밀려서, 또는 시골엔 미래가 없다는 생각으로 도시행을 결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우핑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곳 카카오 농장은 가족 사업이자 지역 사업의 성격을 갖고 있다. 

농장 호스트는 클라라와 파숀 부부지만, 영어가 가능한 미겔(Miguel, 클라라의 남동생으로 현재 미국에 있음)을 통해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일손이 부족할 것 같지는 않은데 저희 같은 우퍼를 받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 관심사는 이 지역 사람들이 시골을 버리고 도시로 떠나지 않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업과 관광을 접목시킨 대체 수입을 늘여야 하고 공정 무역을 위해 전 세계(주로 미국, 유럽, 아시아 일부 국가) 초콜릿 제조 및 판매업자와 연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남매들의 역할이지요. 
우퍼의 도움이 중요한 것은 우리 가족과 이 지역 사람들을 일깨우기 때문이죠. 오늘날 세상은 연결되어 있고, 도시 중심의 불균형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당신 같은 사람들이 직접 보여주고 있잖아요. 그로써 지역 사람은 자신의 삶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는 거죠.” 


크게 한방 먹은 느낌이었다. 

여행을 꿈꾸면서, 미래를 꿈꾸면서, 한국 농업 발전에 이바지할 것이라는 부푼 꿈을 가졌었다. 하지만 뭘로? 막연한 생각이었고 그저 부푼 풍선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소극적이고 개인적인 귀농으로, 도전은 잊고 점점 현실에 안주하는 방향으로 초점이 맞춰지고 있었다. 그런 얄팍한 생각이었다니. 무슨 낯으로 부모님을 뵈려던 건지 부끄러웠다. 


정작 우리 둘도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공부하고 직장을 다녔다. 우리야 여차저차 세계 여행하고 시골에 정착해서 그럭저럭  농사짓고 늙어간다지만, 미래의 우리 아이들은 또 무작정 도시 생활시킬 것이냔 말이다. 근본적인 해결책과 미래지향적인 대안 없는 귀농은 하나 마나다. 
교류. 왜 시골을 떠나는가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모두가 농촌을 떠나고 농가 경영주 평균 연령이 66세(2015년 기준)라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콜롬비아 오지마을에서 배운다. 소중한 삶의 터전을 떠나지 않고 농업 환경을 보호에 대한 고민을 이미  오래전부터 했던 것이다. 사이라와 어린 동생들은 자신의 삶과 카카오 농장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해 갈 것이다. 



일일교사

새벽 네시. 

눈을 비비며 호스트 부부와 아침인사를 나눴다. 윗동네 분교로 일일 수업 가기로 약속한 날이다.  손전등으로 어둠을 비추며 새벽 버스를 타러 가는 길. 아침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어둠길을 오르는 클라라와 아이들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일주일 만에 세상 구경. 

학교에 도착한 것은 아직 7시도 덜 된 시간. 예상은 했었는데 직접 이렇게 분교의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다. 교실은 하나. 대여섯 개의 책상 모둠이 아마도 학년을 뜻하는 듯하다. 수업 준비와 아침 식사까지 준비하느라, 선생님 클라라는 끊임없이 분주했다. 라우라(Laura, 막내딸)를 돌봐주는 율리(Yuli)가 있어 한숨 돌릴 수 있다고 말하는 그녀. 


스테이시 역시 수업 준비를 마쳤는데 영 자신이 없어 보였다. 교실 밖에 홀로 앉아 레몬 나무를 쳐다보며 끝이 안 보이는 고민을 시작한다. 


'아이들이 내 스페인어를 알아들을까?'
'우리를 멀리하면 어쩌지? 낯 가릴 정도로 어린 건 아니겠지?'
'아, 저니는 또 어쩌고. 컴퓨터 수업이라니... '


많이 서툰 스페인어로 조금 덜 서툰 영어를 가르친다? 레몬 나무는 해답을 주지 않았다. 


학교종이 울리고, 어쨌든 스테이시는 수업을 시작했다. 

첫 시간은 5세 반. 꼬맹이 여섯은 에너지가 넘쳤다. 


“넌 하나니까 원, 넌 둘이니까 투. 이제 새 이름으로 부르는 거야. 알았지?
일곱 번째 앉은 선생님은 쎄븐. 이제 질문이 있으면 '세븐'하고 부르는 거야. 알았지?"


"까르르 까르르. 너는 원? 나는 투? 까르르 까르르"


성공이다. 아이들, 내 말을 알아 들었다. 오히려 나를 보는 눈빛이 반짝 반짝 빛났다. 


공책과 연필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아이들은 자신의 노트에 기록하길 원했다. 무슨 얘기만 하면 배우는 것이니까 어서 받아 적어야지 하는 느낌이랄까. 아이들에게 ‘영어’는 재밌는 놀이로 소개해 주고 싶었던 스테이시. 공책과 연필은 모두 압수. 둘러 앉은 책상 위가 텅 비자 아이들은 정말 노는 것으로 인식했는지도 모르겠다.


“놀러 가요. 운동장에 나가서 우리 놀아요. 네, 네?
 놀. 러. 가. 자. 고. 요! 운. 동. 장!(Vamos a jugar en la cancha)"


스테이시 귀가 쫑긋했다. 아이들은 몇 번을 되물어도 완벽한 스페인어로 상냥하고도 정확하게 발음해 주었다. 영어를 가르치러 간 자리에서 거꾸로 스페인어를 배우게 된 것이다. 


초반 십여 분간 집중을 보이던 아이들. 이방인에 대한 신기함과 호기심도 약발이 떨어졌다. 엉덩이가 근질근질해진 아이들. 저니가 나설 때가 왔다. 컴퓨터가 고장 난 탓에 저니의 수업은 취소되었다.


“나는 몽키다. 이번엔 치킨. 요놈들~ 무섭지~?"


아이들은 아무렴 어떠냐 식으로 그저 재미나게 놀았다. 더운 날에 진땀을 흘린 하루다. 


'농장에서 일하는 게 낫겠어. 너무 힘들다 애들' 



다음은 9세 반. 

안드레스와 르페(Lupe, 켈리 동생). 아는 얼굴이 둘 씩 있으니 한결 맘이 편안하다.


“어느 정도 배웠나 보자. 오늘은 복습이 좋겠다. 월요일은 영어로 뭐지? 
“몬다이(Monday)"


다들 확실하게 스페인식으로 읽고 있었다. 


“몬다이(Monday), 쑨다이(Sunday)가 아니고, 먼데이, 선데이, 오케이?"


스페인어가 모국어인 남미의 아이들 역시 영어가 어렵구나. 우리에게 스페인어가 어렵듯이.


수업이 끝나고 축구 대결이 펼쳐졌다. 시멘트 바닥 운동장에선 튼튼한 운동화가 필수다. 슬리퍼를 신은 저니와 고무신을 신은 스테이시는 각자 한 번씩 발에 찰과상을 입고 나서는 몸을 사리느라고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하지 못해 아쉬웠다. 핸드폰을 손에서 놓을 줄 모르는 요즘 도시 애들과는 노는 방법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런 자연스러운 모습이 귀해져 버린 요즘 세상. 부모들은 들판에서 뛰어놀며 컸어도 자식들에겐 정작 놀 기회를 주지 않는 요즘 부모들. 우리도 늘 경계해야 할 부분. 


정말 오랜만에 공을 찼다. 신났다. 재미났다. 그리고 피곤했다. 


수업중인 스테이시




소젖 짜기


카카오 콩이 나무통에서 발효되어 가는 동안 우리의 오지 생활도 차츰 적응돼 갔다. 

하루에도 수차례 비가 퍼붓는 이곳. 그러다 아침 나절 또는 오후 한 때엔 '쨍!'하고 하늘이 갠다. 그런 무더위에 적응하느라고 스테이시의 몸통엔 땀띠가 돋았다. 비가 끊이지 않자 가려움은 더욱 심했지만 이 오지에 베이비파우더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참는 것 외엔 방도가 없었고 하루하루 그렇게 지내니 나름 적응이 되는지 사글어 들기 시작한다.  


켈리와 함께 고대하던 소젖 짜기에 나섰다. 밤새 분리를 당한 어미소와 새끼 소가 상봉을 하는 아침시간. 언덕배기에 몰려 풀 뜯던 어미소를 외양간으로 몰았다. 새끼에게 젖 주러 가는 걸 아는 어미들은 한눈팔지 않고 직진이다. 어미소가 나타나자 송아지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음메~음메~ 젖 먹던 송아지를 어미에게서 떼놓느라 진땀을 뺐다. 


송아지가 젖 빠는 힘이 얼마나 센지 알겠다. 손아귀와 팔에 힘은 많이 들어가는데 우유는 잘 나오지도 않고 손만 아프다. 요령이 없어서다. 켈리는 식은 죽 먹기라는 듯 시범을 보이는데, ‘이쯤이야’라는 표정으로 양손으로 채 1분도 되지 않아 2 리터 통을 다 채웠다. 세 마리에 약 10리터 좀 못된 것 같다. 착유 목장에서는 하루  두세 번 착유로 마리당 30리터 이상 얻는다는데 그러려면 소가 얼마나 과식을 해야 하는 걸까. 소가 좋아하는 신선하고 맛있는  풀은커녕, 전 세계 농가 대부분이 옥수수 사료를 먹이는 현실. 이곳 소들은 정말 축복받았음에 틀림없다.    


착유를 위해 떨어뜨려놓은 송아지를 놓아주자 자기 어미를 찾아가 젖을 힘차게 빨기 시작했다. 처음보다 양이 줄어 잘 나오지 않는 어미젖을 툭툭 보챈다. 이내 어미와 함께 새끼들을 신선한 풀 가득한 곳으로 안내해주었다. 


“그런데 켈리, 소젖을 매일 이만큼씩 짜야야 돼? 송아지가 다 먹게 놔둬도 되잖아. 저렇게 좋아하는데"
“송아지가 그 많은 양을 다 먹으면 설사 병나. 그래서 밤새 어미에게서 떼어놓는 거야. 그리고 젖을 다 짜 주지 않으면 어미가 유방염에 걸릴 수도 있기 때문에 잘 짜 줘야 해. 이렇게 끝까지 말야"


도통 알아들을 수 없어 나중에 노트에 적어달라고 부탁해서 이해한 내용이었다. 

이제야 감이 잡힌다. 새끼가 먹을 것 까지 인간이 뺏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물론 오늘날의 착유 목장, 마치 젖소라는 화학 기계에 사료라는 원료를 투입해서 우유라는 제품을 생산하는 시스템에선 공공연히 일어나는 일이다. 인간 소비를 위해 과도한 착유와 지나친 먹이로 고통받는 동물, 마케팅이란 포장으로 소비가 늘어만 가는 유제품들, 진실은 파묻히고 소비자는 그 불편한 진실을 외면한다. 


건강한 토양, 신선한 풀, 행복한 어미소와 송아지, 품질 좋은 우유 생산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소젖짜기에 도전!




여행 일 년이라고?  


낮부터 오던 비가 저녁까지 이어지고 급기야 전기가 나갔다. 이곳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라지만, 얼마 전엔 닷새 동안 계속된 단전으로 불편이 많았다며 발전기를 마련해야겠다는 호스트 부부. 식탁에 촛불을 밝히고 저녁을 들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 전기 없던 시절의 세상으로 돌아간 듯했다. 


밤의 어둠이 깊어갈수록 비바람 소리도 짙어졌다. 뭔가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그런 소리였다. 거대한 땅을 흔드는 비바람 소리에 귀와 마음을 맡겼다. 어느 순간 깊은 잠에 빠졌다. 


비 온 뒤의 아침 풍경은 구름 안개가 아직 걷히기 전이었다. 아침 풍경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이곳에서 나는 파넬라(Panela, 정제하지 않은 순수 흑설탕)를 조금 넣은 덕에 커피는 달콤했다. 앞마당에 앉아 그러고 있으니, 우리가 고도로 발달된 현시대를 살고 있다고는 생각 들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지구에 있을 뿐. 

한국을 떠나온지 일 년째 되는 날. 콜롬비아 어느 카카오 농장 마을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지구 반대편으로 멀리 돌아왔지만, 우리가 여행을 마친 후 돌아갈 곳도 이와 비슷한 곳이길 바랐다. 그 곳에서 농업에 대한 보람과 긍지를 가질 수 있는 삶을 꿈꾸며, 오늘은 오늘의 일을 하자!   


전기는 나갔지만 덕분에 운치 있는 저녁이 되었다



일을 적당히 해야지 (2)

어렸을 적 부뚜막이 있는 온돌 아궁이의 정겨움이 포곤(Fogón, 콜롬비아식 화덕)에서 느껴진다. 다만, 포곤는 순전히 요리용이다. 가스레인지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포곤에서 음식을 짓는다. 날이 푹푹 찌지만 상관 않는 건지 참을 수 있는 건지, 켈리가 더욱 대단해 보인다.  


한적한 토요일. 

켈리의 장작 패는 수고를 덜어주려고 저니가 도끼를 집어 들었다(켈리는 장작패기의 고수이기도 하다).  

한낮 땡볕 아래, 늘 그렇듯 서투른 목수는 또 연장 탓을 했다. 도끼가 잘 들어가지 않아 연장을 바꿔보지만, 연일 이어진 비로 장작이 습기를 먹었는지 톱질도 쉽지 않다. 금세 땀으로 범벅이 된 저니. 


한편 스테이시는 켈리를 따라 유카(Yuca)를 캐러 골짜기를 건넜다. 고구마 같기도 하고 감자 같기도 한 유카는 페루에서부터 즐겨 먹은 탄수화물 공급원으로 쪄도 좋고 튀겨도 좋다. 카카오 콩을 담던 통에 한 가득 캐 담았다. 그걸로 일주일은 너끈하다며 기뻐하는 켈리. 천상 살림꾼이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뒤꼍에서 레몬을 땄다. 켈리는 레몬 따기도 선수급이다. 스테이시는 선수 앞에서 괜히 웃음만 주고 바쁜 시간만 뺏을 것 같아 그저 떨어진 레몬만 주워 담았다. 잘 익은 레몬은 색이 노란 것이 꼭 오렌지 같다. 시원한 레모네이드가 닷 맛이 났던 게 알고 보니 요 익은 걸로 만들기 때문이란다. 천연 레모네이드 증명 끝.


저니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정자에 앉아 쉴 때면 어김없이 켈리가 다가와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건넨다. 고맙다는 말이 겨우 나올 정도로 기진맥진한 모습이다. 


‘저니가 저렇게 진땀 흘리며 육체 노동을 한 적이 있던가? 괜찮으려나...' 


오전 내내 그루터기와 씨름을 하더니 겨우 이삼일 쓸 만큼 자른 모양이다. 그 정도로 마치고 휴식에 들어간 저니. 좀 쉬겠다며 들어가더니 오후 내내 그 더운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휴식에 들어간 저니는 놔두고 아이들과 며칠 전 우핑에 합류한 데스(Des)와 함께 계곡으로 물놀이를 갔다. 데스는 아프리카 2세 영국인으로, 고향 '시에라 리온'으로 돌아가 농장 레스토랑을 꿈꾸는 아저씨. 오십이 가까운 나이에도 육체와 정신 세계는 젊음의 에너지가 넘친다. 

연일 내리는 비로 계곡 물은 흙빛이다. 벗을 건  장화뿐. 일 하던 옷 그대로 물에 들어가니, 마치 오르막길에서 자전거 타다가 소나기 맞은 것 같다. 머리까지 푹 적시자 열기가 사그라들었다. 감기 탓에 뭍에 있던 안드레스(Andres)가 사진을 찍어 주었다. 카메라를 비출 때마다, 동갑인 율리와 사이라는 모델 포즈 취하기에 바빴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몸도 마음도 완전히 시원해졌다. 저만치 앞서 뛰어가는 아이들 모습을 지켜보며, 어린 시절 도랑에서 멱감고, 꿀밤 나무숲에서 놀던 그때가 그리워진다. 


'커다란 꿀밤 나무 밑에서~♫
친구하고 나하고~정다웁게 얘기합시다~♫
커다란 꿀밤 나무 밑에서~♫’


그날 밤. 

저니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열이 내리지 않았다. 바늘로 찌르는 듯 발끝이 아프다는 호소에 밤새 주무르고 냉찜질하느라 스테이시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지금에 와서 입 밖에 내어 봤자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딱한 사람. 적당히 좀 하지. 자기 한계치를 넘겨가면서까지… 원인은 장작패기 중독이었다. 


며칠 후, 스테이시는 직접 체험하였다. 나무를 하다 보면 오기가 생긴다. 조금만 더하면 '될 듯 될 듯’한 그 기대 때문에 쉽게 손을 놓을 수가 없던 것. 그래서 일에는 룰이 있어야 하는 거다. 도끼질을 몇 번 해 보면 상황이 파악돼야 한다. 잘 마른 장작인지, 아닌 것 같으면 더 마를 때까지 둬야 한다는 걸, 계속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집착이라는 걸. 늘 일이 나고 후회를 한다. 


저니가 차도를 보인다. 꼬박 꼬박 알약과 비타민을 챙겨준 안드레스 덕분인가 보다. 하룻밤이 더 지나고. 사나흘은 아프던 사람이 이틀 만에 나아 본인도 놀라워했다. 안드레스의 정성과, 천연 비타민 만다린 주스로, 그리고 자연의 품 속에서 치유력을 얻은 것일 지도 모르겠다. 


장작팬 뒤 몸 살이 난 저니. 으이구.



이 한잔을 맛보려고  


드디어, 궁금증으로 가득한 초콜릿을 만들었다. 직접 수확한 카카오로 만든다면 더욱 의미 있겠지만, 날씨 때문에 발효도, 건조도 언제 마칠지 알 수 없었다. 미리 말려놓은 카카오를 포곤에서 볶았다. 커피와는 달리, 볶는 과정에서는 향이 거의 없다. 열기를 식힌 후, 속껍질을 벗긴다. 콩에 남은 열 때문에 손가락에 물집이 잡혀 가는 줄도 몰랐던 스테이시. 데스가 근처에도 오지 않더니 힘든 작업인지 알고 그랬나 싶다. 아무 일 없는 듯 엄지를 아껴가며 계속 껍질을 깠다. 속껍질을 벗은 반질반질한 카카오 콩. 드디어 익숙한 그 초콜릿 특유의 향과 쌉싸름한 맛이 난다.  


껍질을 깐 후 수동 분쇄기에서 1차 분쇄를 거친다. 계피와 정향 등 취향에 맞게 향신료를 더한 뒤 2차 분쇄에 들어간다. 곱게 갈리는 카카오는 걸쭉하고 끈적끈적한 상태가 되었다. 향신료가 카카오에 잘 베도록 고루 섞어준 다음 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굳히면 그걸로 완성. 끝? 뭔가 이상하다. 이곳에서는 시중에서 파는 '설탕 초콜릿'은 만들지 않고 전통 방식대로 100% 순수 카카오 초콜릿을 만들어 파넬라 물 또는 우유에 넣어 먹는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따듯한 핫 초콜릿을 한 잔 받아 들고 호호 불며 순수 초콜릿을 음미하였다. 이 한잔을  맛보려고 땀띠가 나고 벌에 쏘이고, 몸살이 나고, 물집이 잡히고... 지난 열흘 간 온갖 고생을 하였구나. 카카오가 초콜릿이 되기까지. 이걸로 모든 과정을 마쳤다. 


치즈를 곁들인 핫 초콜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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