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Pe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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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 저니, 스테이시
우프란?
WWOOF(World-Wide Opportunities on Organic Farms)는 유기농가와 자원봉사자를 연결하는 세계적인 네트워크로 금전적인 교환이 없는 신뢰를 바탕으로 그들의 문화교류와 교육의 기회를 넓히고 자연과 공존하며 지속가능한 글로벌 사회를 만드는 운동(프로그램)입니다.
기간 : 2015.6.1 - 2015.6.30
작물 : 커피
지역 : 라 메르세드 (페루 찬차마요)
돌아갈까 말까
커피는 쓰기만 하다. 리마에서 버스로 열 시간도 더 되는 거리. 밤새 달려 도착한 라 메르세드(La Merced)'. 아침에 보자던 우프 호스트는 점심 나절이 다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다. 버스 터미널 앞 커피숍에 덩그러니 남겨진 저니와 스테이시. 시간이 갈수록 갈등은 깊어가고, 저니가 입을 뗀다.
"안 되겠어. 타고 온 버스 타고 그냥 돌아가자!"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죠? 버스시간 알아보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버스는 모두 저녁 늦게 출발하는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어차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니 좀 더 있어보자며 커피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수면 부족까지 겹쳐 눈의 피로가 점점 쌓여가던 그 무렵, 오토바이 한 대가 멈추고 중년 남자가 말을 건네 왔다.
"오래 기다리셨죠?"
그의 이름은 빅터(Victor). 호스트 아비엘(Abiel)이 경영하는 '에코로직 찬차마요(Ecologic Chanchamayo)'란 커피 회사의 부장쯤 된다고 했다. 그를 만나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와도 좋다는 메시지 하나만 믿고 달려오긴 했는데 아무도 맞이해주는 이 없을 때, 이방인이 느낄 불안과 초초함을 그들이 알랑가 몰라. 남미 특유의 여유로움이라고 하기엔 이번 건은 한참 지나친 것이긴 하나, 한편으로 어차피 기다릴 거 그토록 속을 태워야 했냐는 후회가 남는다.
앞장선 빅터 뒤로 우리는 모터카, 일명 '툭툭이(오토바이를 개조한 3인용 택시)'를 타고 사무실로 이동했다. 라 메르세드(La Merced) 읍내 한복판에 위치한 그곳은 갖은 설비를 갖춘 커피 가공장이었다. 건물 한편에서는 커피숍 공사가 한창이었다.
가공장 책임자인 마틴(Martin)은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도, 의욕도 대단해 보였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설비를 둘러보고 있는 사이, 호스트 아비엘(Abiel)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페루 최대 커피 생산지로 알려진 이곳 찬차마요(Chanchamayo)’지역. 호스트의 회사 '에코로직 찬차마요'는 크고 작은 유기농 커피 농가로부터 커피를 사들여, 생두는 수출하고, 로스팅 한 원두는 국내 유통하는 일을 한다. 뿐만 아니라, 직영 농장과 커피숍, 관광 연계 등 다양하게 사업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다. 그 모든 사업의 대표인 아비엘. 얼굴 도장이라도 찍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빅터 대신 마틴이 숙소, 라 초사 오스탈(La Choza Hostal)로 안내해주었다. 우퍼들을 위해 호스트 회사와 특별 계약을 맺은 그 숙소는 음식점과 숙박을 겸하고 있었다.
"내일 로스팅 할 거예요. 꼭 와요"
돌아가던 마틴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모습이 멀어져가는 동시에 피곤이 몰려왔다. 무척 길었던 하루. 세계 10대 커피 생산국 페루. 공장 일부터 시작하긴 했지만 우핑의 막은 올랐다. 여기서 한 달, 앞으로 잘 해보자!
전문가의 필요성
다음날 아침 9시. 출근하는 직장인처럼 툭툭이를 잡아 타고 '토스타도라'(Tostadora)로 향했다. '토스타도라'는 스페인어로 '볶는 기계 또는 사람'을 의미한다. 로스팅(Roasting)과 같은 의미이다. 우리는 어감이 재밌어서 가공장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했다.
아침부터 토스타도라엔 커피 향이 가득하다. 양피지 콩이 상품으로 재탄생되는 일련의 작업 과정을 바리스타 마틴이 꼼꼼히 설명해주었다. 스페인어 이해가 느린 우리를 위해 노트에 손수 그림을 그려가며 열심히다.
이제 실습할 차례.
껍질콩 한 포대를 채반기에 쏟아 넣자, 석발(石拔)라인은 누런 먼지를 일으키며 돌과 불순물을 걸러낸다. 소음과 함께 탈곡기로 옮겨져 양피지를 벗고 알맹이만 남은 그 풀색 콩이 바로 생두. 상상한 것보다 크기가 작았다. 다음은 로스팅 단계. 섭씨 200도가 넘는 고온에서 커피가 볶아지고 있다. 풀색을 띄던 생두는, 연노랑에서 금빛으로, 금빛에서 갈색으로 점차 변해갔다. 중간중간색과 향을 살피면서 마틴이 묻는다.
"무슨 향이 나는지 말해보세요. 고구마, 풋과일, 초콜릿, 그리고 또?"
마일드, 미디엄, 다크, 디카페인 등 원하는 정도에 따라 시간을 달리한다. 로스팅을 막 마친 커피콩을 꺼내어 상온에서 서서히 식힌다. 열에 의해 무게는 줄고 부피는 늘었다. 마틴은 전날 로스팅 한 커피를 한 잔 내려 주었다. 취향 차가 있겠으나 갓 구운 커피는 풍미가 별로라고 한다. 산지에서 갓 볶은 신선한 커피. 맛은 과연 어떨까?
“마틴! 부드럽고 깔끔한 맛이네요. 특유의 꽃향기가 있어요!”
저니의 지식에 의하면 커피는 ‘로부스타(Robuster)’종과 ‘아라비카(Arabica)’ 종으로 나뉜다. 예전 다니 전 회사에 커피사업부가 있어 로부스타종을 똑똑히 기억한다. 라오스(Laos) 산이었던 그 커피의 맛은 쌉싸름하면서 흙 맛이 약간 느껴졌고 향은 약했다. 반면, 이곳 찬차마요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은 아라비카로 우리 입맛엔 잘 맞았다. 날마다 이 신선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니, 이런 황홀한 우핑이 또 있을까.
갓 뽑은 커피 한 잔씩 받아 들고 홀짝거리고 있던 그때, 승합차에서 내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다. 내국인 관광객들이었다. 자주 있는 일인지, 마틴은 매우 능숙하게 손님을 맞았다. 커피에 대한 기본 설명을 마친 다음, 제품 홍보와 시음 행사로 고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의 스페인어 설명을 다 알아듣지 못해도, 그의 열정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그는 프로다. 더운 날,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그가 쏟은 정열만큼, 찬차마요 커피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점차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게 될 것이란 걸 믿는다.
귀농은 단지 시골에서 농사짓는 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농촌과 연계한 사업 모델 구축. 건강한 먹거리를 소비자에게 어떻게 알릴 것인지, 크든 작든 지역 발전에 대한 모색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한국 농촌의 많은 생산 전문가(그마저 급격히 줄고 있는 실정이지만)와 더불어, 유통과 판로를 혁신하고 홍보를 책임질 분야별 전문가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꿈꾸는 귀농. 아직 구체적인 것 하나 없지만, 그 상상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원래 하던 일이 뭐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커피 가공장으로 향하던 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본사 사무실로 가보라는 지시. 우리 숙소에서 넘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워 더욱 여유로운 아침을 맞을 수 있게 됐다.
그간 남미를 여행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사무실을 본 것 같다. '에코로직 찬차마요’ 본사도 그중 하나. 창고도 되고 차고도 되는 널찍한 공간 한 켠에 마련된 사무실. 위층엔 번듯한 사장실도 갖췄다. 커피 매입과 수출 관련 업무 등을 처리하는 사무실엔 직원이 대여섯쯤 되었다. 직원들과 인사를 마치고, 이 층에 있는 아비엘에게 불려갔다.
“저니, 당신이 원래 하던 일은 뭔가요?”
“그래픽 디자인과 웹 프로그래밍으로 최근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개발도 겸하고 있습니다. 여행 중에도 인터넷만 된다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일이라, 이따금 한국에서 일을 받아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럼 부탁하나 합시다. 커피 포장 디자인을 새로 했으면 하는데, 괜찮겠어요?"
반가운 부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토스타도라에서 포장일을 하면서 아쉬움이 있던 터였다. 칙칙한 포장지가 영 맘에 들지 않는 저니는 이미 새 디자인 콘셉트도 머리에 생각해 두었다. 허나, 회사 로고와 제품군 별로 디자인을 하려면 하루 이틀로는 안 되기에 가공장 일은 오전이든 오후든 우리 편의에 맞춰 반나절만 하기로 했다.
“스테이시 당신은 무역을 했다고 들었는데, 해외 거래처 소싱은 어떻게 합니까?”
영업 비밀을 털어놓으라는 다소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14년 간의 무역 경력. 그에 대한 자존심이 남았던 걸까, 말을 돌려 되묻는 스테이시.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시간과 공이 많이 들어가지요, 뭐 필요하신 거라도?"
“한국의 커피 딜러 및 수입 업체 리스트입니다."
한국 시장에 진출하고 싶다는 얘기다. 디자인과 검색, 두 가지 모두 우퍼에게 요구하기엔 무리가 있는 부탁이었지만 흔쾌히 받아들였다. 모두 숙소에서 작업할 수 있는 일이므로 여유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어 좋겠단 생각에서였이다. 그리고 한 달 계획하고 시작한 이곳에서의 우핑. 일주일이 지나고 생활이 단조로워지려던 참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커피 농장엔 언제 가는 걸까?
숙소에 창문이 없어 아침이 언제 밝는지도 모르고 늦잠을 잤다.
새로운 근무처인 숙소 식당은 아침식사 온 손님으로 북적이더니 여덟 시가 지나자 한산해졌다. 남은 건 우리 둘 뿐. 노트북이 한 대뿐이므로, 작업을 나누었다. 저니가 스케치북에 손그림을 그리는 동안 스테이시가 노트북을 썼다. 인터넷이 무척 느리다고 느낀 스테이시, 예상보다 오래 걸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남미에서는 여러모로 느긋해야 하는구나.
커피 농장에 커피가 없다
드디어 농장에 간다는 얘기에 들뜬 맘으로 본사 사무실에 들어섰다.
“운전할 수 있죠?"
저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빅터 부장이 자동차 키를 건넨다. 직접 운전해서 농장에 다녀오라며 창고 앞에 주차된 빨간색 밴을 가리킨다. 남미에선 소형 트럭이나 밴을 카미오네타(camioneta)라고 부른다. 도로 사정이 좋은 한국에서야 일반 트럭이면 충분하지만 국토도 넓고 그 만큼 비포장도 많아 사륜구동 카미오네타가 이곳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차종. 대부분 일본차란 점이 한국인으로서 다소 안타까울 뿐이다.
오랜만에 잡는 수동 운전대. 한 달 전 볼리비아에서 지프를 몰았던 경험이 유용했던지, 운전할 만하다고 느끼는 저니. 한 시간 반이 넘도록 지루함을 몰랐다. 군데군데 경찰들이 차량 단속을 하고 있다. 죄 진 것은 없었지만 왠지 잡히면 피곤할 것 같다. 앞서 가던 큰 차 꽁무니에 바짝 붙어서 그냥 지나칠 수 있었다. 괜히 심장이 쫄깃해진 기분.
숙소가 있는 시내에서 50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유리나키(Yurinaki)’라는 이름의 지역.
드문 드문 판잣집이 보이는 비포장 도로를 30분 더 달리고, 길이라고 볼 수 없는 오르막 농로를 십여분 더 달려 산 중턱에 닿았다. 그곳이 아비엘의 유기농 커피 농장이었다. 전화 신호도 잡히지 않고, 전깃줄도 보이지 않는 고립된 산 속이었다. 집터만 남은 듯한 그곳에서 콧수염이 매력적인 농장 매니저 펠리페(Felipe)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아이얀추! 쿰파!! (Allillanchu! Khumpa!! = 안녕하세요, 친구)"
뭔가 잘 못 알아듣은 건가? 스페인어가 아닌 거 같은데… 잉카의 언어인 케추아(Quechua)였다. 마추픽추 아랫마을에서 나고 자란 그는 조상의 언어를 잊지 않았나 보다. 얼마 전 다녀온 마추픽추, 잉카의 후손을 만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인사를 마치고 농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허름한 건물 맞은편엔 새로 지을 집 기둥을 세우기 위한 기반공사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달 말 때쯤 이면 다 지을 거라지만, 한참 더 걸릴 것이다. 시내에 공사 중이던 커피숍도 이 달 말에 오픈한다고 했지만, 우핑이 끝나고 3개월이 지나서야 개점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산 길을 따라 커피 밭이 보였다.
그간 농장에 오지 않은 이유가 밝혀졌다. 풀숲에 숨겨 놓은 듯한 커피나무들은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묘목이었던 것으로 3년은 지나야 열매가 맺힌다고 한다. 빨간색의 커피 열매를 보고 싶었지만, 하는 수 없다. 길을 조금 더 내려가자 평평한 땅에 비닐을 쳐놓은 육묘장이 보인다. 그물망 아래로 초록의 모종들이 가득하다. 특이점은 뿌리 포장이었다. 커피(카카오도 마찬가지)는 품목 특성상 병충해 전염도가 높기 때문에 하나하나 따로 뿌리를 감싸 놓는다고 한다.
구경은 거기까지. 다섯 시도 안 된 시간인데 먼산으로 해가 넘어간다.
비포장 길, 노면 상태가 나쁜 아스팔트, 사고 나지 않으려면 서둘러 산을 내려가야 했다.
그리운 자전거
이번 우핑의 주된 일은 ‘운전’ 임을 서서히 알게 됐다.
호스트 아비엘의 가족(아버지와 여동생)을 농장까지 태워 주고 다시 데려오고 하는 일. 저니는 운전만 하는 셈이었고, 스테이시는 운전수 말동무를 하는 게 전부였다. 돈을 받는 일도, 주는 일도 아닌 우핑. 무슨 일이든 시켜주면 하면 되는 것이고, 안 시켜주면 놀면 되는 것을 자꾸 욕심을 부리고 간섭을 하려고 한다. 그저 마음을 비우자며 저니가 스테이시를 토닥인다.
농장에 비료를 내려놓고 한 숨 돌리니 벌써 해가 진다.
다시 시내로 돌아가는 길. 아뿔싸! 이 늦은 밤에도 단속을 하고 있다니! 꽁무니에 붙어갈 트럭도 없고, 경찰의 수신호에 따라 갓길에 차를 세웠다. 면허증과 무슨 서류를 자꾸 제출하라는데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다.
“면허증 사본 밖에 없는데요.”
난감한 표정을 짓는 경찰에게서 핸드폰을 빌려, 아비엘에게 전화를 걸었다. 삼십 분 가량 이어진 경찰관과 아비엘의 통화. 이윽고 가도 좋다는 지시가 났다. 역시 걸리면 피곤하다.
다음날. 아비엘의 지시로 빅터가 문서를 하나 만들어 주었다. 우리의 신분을 회사에서 보증한다는 내용이었다. 운전면허증 사본과 여권 사본도 각각 인쇄하여 한 봉투에 넣었다. 서류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서류를 본 경찰은 단번에 통과시켜주었다. 더 이상 경찰을 만나도 마음 졸일 일은 없었다. 진작에 좀 만들어 주시지.
한 날은 전날 내린 비로 농장으로 진입하는 비포장 오르막이 완전히 진흙길로 변해 있었다.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 망설이는데, 뒷좌석에 앉은 호스트 부친 로렌소(Lorenzo)가 ‘한 번 가봅시다’란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나 다를까, 차바퀴가 헛돌더니 길 옆 낭떠러지로 자꾸 밀리는 것이 아닌가. 식은땀이 줄줄 난다. 도브레(4륜 구동) 모드로 변경했는데도 별 차이가 없다. 로렌조가 차문을 열고 나가더니, 앞바퀴 축의 레버를 돌려 주었는데, 그제야 힘을 받기 시작하고 곧 차가 움직인다. 또 한 번은 가속 페달을 밟지 않았는 데 엔진 회전수는 최대치로 올라가며 굉음을 냈다. 오토 차량이었다면 급발진 사고로 이어졌을 거란 생각을 하니 아찔하기만 하다. 수동 차량이라 클러치 페달을 밟아 동력 전달을 차단하고 시동을 끌 수 있었지만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운전하면서 겪을 수 있는 상황들을 페루에서 다 겪은 듯하다. 덕분에 수동운전은 이제 자신이 생겼지만 그래도 자동차보단 자전거가 좋다. 리마에 두고 온 오달, 내심이가 그립다.
삼 형제와 담배, 그리고 불편한 마음
농장에 나타난 새로운 얼굴들, 젊고 건장한 삼 형제.
산허리에 심어 둔 어린 커피나무를 에워싼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 임시로 고용된 일꾼들이다.
듬직한 맏형 브라이언(Bryon)은 말이 별로 없는 의젓한 청년이었고, 호기심이 많은 둘째 리키(Ricky)는 질문도 많고 웃기도 잘하는 쾌활한 아이였다. 그리고 막내. 잭(Jack)은 수줍음은 많지만 형들을 잘 도와주는 자상한 아이였다. 야생에 가까운 이곳에서 그들은 2주간 숙식하며 작업한다고 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세 사람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생닭을 잡고, 모닥불을 지피는데 무척 자연스러워 보였다. 어느새 페루식 닭백숙이 완성됐다. 젊은 남정네들이 만들어서 그런가 맛있다를 연발하는 스테이시.
배불리 한 그릇씩 뚝딱 비우고, 풀 베러 가는 삼 형제를 따라나섰다.
그들의 손에는 마체타(Macheta)라고 해서 끝이 둥그스름한 칼이 들려져 있다. 한국에선 낫을 주로 쓰는 반면 남미는 마체타를 사용한다. 연장을 다루는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아직 커피나무가 작아 잡초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데도 용케도 커피나무만 피해 잡초와 나무들을 제거해 나간다. 한 시간이 지났을까, 휴식을 취하는 그들. 붙이성 좋은 리키가 저니에게 말을 건다.
“저니, 혹시 담배 있어?”
9년간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게 된 게 다행이랄까. 자기가 태울 한 개비만 빼놓고 담뱃갑째로 줘버리는 저니. 나이를 떠나 이런 고된 일을 하는 삼 형제가 마음에 자꾸 걸렸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그들과 비슷한 나이에 서울로 상경해 궂은일을 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너희들 여기서 일하면 얼마나 받니?”
“2주간 일하고, 인당 100 솔(한화 약 3만 5천 원)씩 받기로 했어”
담배연기를 내뿜으면 해죽거리던 리키의 말이었다. 아무리 어리다 해도 다들 성년을 넘긴 나인데, 그렇게 적은 품 삯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이곳 나름의 임금 기준이 있겠지만, 페루의 월 최저 임금이 800 솔(한화 약 27만 원가량, 2013 기준)이란 걸 감안해도 턱없이 모자란 느낌이었다. 상대적으로 낮은 물가로 생활은 될지 모르겠으나, 조금 더 받고 기호품도 지원되면 얼마나 좋을까. 짧은 시간 스쳐가는 낯선 이방인이 단면만 보고 왈가왈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불편한 마음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러건 말건 코카잎을 잔뜩 입에 넣고선 삼 형제는 해맑게 웃는다. 코카잎을 먹으면 입속과 턱까지 얼얼하게 마비되는 느낌이 있다. 막노동을 해본 사람이면 알 테지만 힘을 많이 쓰는 일이라 자신도 모르게 이를 꽉 물기 때문에 잇몸이 아프고 어금니가 상하는 경우가 많다. 코카잎은 고산병에 좋다고 하지만 이곳은 그리 해발이 높은 곳도 아니다. 그들에겐 코카잎은 진통제인 셈이다. 다음에 올 땐 코카잎 좀 사다 달라는 부탁이 애잔하게 들린다.
페루 여행 중 두어 번, 한국말을 조금 하는 페루인을 만난 적이 있다. 한국에서 일했다는 외국인 노동자들로 기회가 되면 언제든 또 가고 싶다고 하였다. 현재 한국은 61만명(행자부 2015) 정도가 외국인 노동자라고 한다. 그중엔 농촌에서 고된 일을 도맡아하는 외국인도 꽤 있을 것이다. 한때 외국인 노동자를 주제로 했던 개그방송 유행어가 생각난다.
‘싸장님 나빠요’
다른 나라를 다녀보고, 다른 나라 사람을 만나보니, 우리나라와 국민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다. 요즘에야 그러겠냐마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대우를 하는 일은 없다고 믿고 싶다.
잘 있어요. 찬차마요
한 달도 다 가고 이제 마지막 한 주가 남았다.
커피 열매를 못 본 우리의 아쉬움을 눈치챘는지 펠리페가 옆 마을 농장을 구경시켜주었다. 가지 사이로 주렁주렁 달린 커피 열매. 빨갛게 잘 익은 알을 하나 따다 입에 넣어보니 제법 달다. 끈적끈적한 과육 껍질을 벗겨낸 다음 알맹이를 발효시켜 건조한다.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 바로 ‘원두’.
옆 마을에 갔던 이유는 또 있었다. 농장 연못에 방류할 새끼 물고기와 수중 식물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작은 연못에 물이 빠지자 손가락 만한 물고기들이 파닥파닥 나 죽는다고 난리다. 줄잡아 삼사백 마리. 깨끗한 물로 샤워를 시킨 후 양동이에 담아 다시 아비엘의 농장으로 돌아갔다. 연못에 물고기를 키우는 건 잡아먹기 위해서란다. 두어 달 지나면 팔뚝 크기 만큼 자란다면서 삼 형제는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뭐라도 주고 싶은 맘에 그저 좋아하는 담배 세 갑, 여분으로 갖고 있던 자전거 복을 선물하고 삼 형제와 작별하였다.
마지막 며칠은 호스트가 요청한 일(포장 디자인 작업과 커피 수입업체 목록 작성)을 마무리하느라 쉴 틈 없이 바빴다. 호스트를 직접 만나 우프 관련 인터뷰도 하고, 작업한 것을 보여주며 설명도 곁들이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대신, 시내에서 칼라 인쇄를 해와서 봉투에 넣은 후, 정성 들여 작성한 우프 방명록과 함께 숙소에 남기고, 리마행 버스에 올랐다.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었지만 한 달간 함께 했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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