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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안 Jan 13. 2021

벤치 까지만


책방에  즐겨 앉는 자리가 있다

안쪽으로 들어와 오른편에 놓여있는 창가의  긴 테이블이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 테이블 끝자리에 앉아 책방에  관한 업무를 보거나  새로 입고된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카운터 안쪽으로 작은 책상 하나를 마련해 두었지만 햇살도 들어오고 건너편 산을 바라볼 수 있는 이 자리가 나는 더 에 든다



창가 앞을 지나는 동네 분들과  인사를 나누는 일도 잦다. 시간이 지나니  제법 아는 얼굴도 생겨  창을 사이에 두고  가벼운 목례를 건네거나  아이들에게는 손을 흔들어 보이기도 한다.  

창문 앞에  3인용 크기의 원목색  나무 벤치를 놓았다.  지인께서 만들어 준  야무지고 튼튼한 의자다. 책방 손님만을 위해서라기보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길을 오가시며 잠시라도 앉아 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벤치를 놓으니  단박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물론이고, 동네 아이들도  간간이 앉는다.

그뿐인가.  가끔은 이름 모를 새도 홀연히 날아와  앉고  이번 가을엔  낙엽들도 살포시 와서 한 귀퉁이를 탐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바람도 불어와 쉬고 갔을 것이다.


얼마 전부터  몸이 약간 불편해 보이는 남자분이 계속 찾아와 벤치에  앉고 있다.

얼핏 봐서는 60대 초반 가량 되어 보이는데 정확히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거의 일정한 시간에  찾아와  벤치에 앉았다가 돌아가곤 했다. 창을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그와  나의 거리는 겨우 1미터 정도여서 서로의 얼굴을 살필 수 있었다. 그는 항상 위아래로 두꺼운 검은색 등산복 차림에 손에는 색이 바랜 스웨이드 남색 장갑을 끼고  회색으로 된 겨울용 방한모자와 면 마스크로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몸은 좀 불편한 상태였지만  유독  그의 눈빛 밝고 힘 있게 느껴졌다. 많은 곳을 가리고 있어서 눈빛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것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가 정신력만큼은  건강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의 심정은 눈에서 드러난다는 말이 있듯이,  어쩌면 자신의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과 빨리 건강해지고 싶은 간절함눈빛 속에 담겨  투영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벤치에 앉은 그와  몇 번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어색한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혹시나 불편할까 싶어서 일부러 그 시간에는 자리를 피하기도 했는데 서로 멋쩍은 눈인사를 두어 번 나누다 보니 차차 아무렇지 않아 졌다.

그는  의자에  앉아  한 팔로 양쪽 다리를 주무르는 것을 시작으로 한눈에 봐도 단단히 굳어있는 왼팔을 오른손으로 열심히 어루만졌다  그렇게 십여분 정도 몸을 만져주고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왔던 길을 부지런히 되돌아가기를  매일 반복하고 있었다.


하루는  부슬거리며 겨울비가 내렸다.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를 듣고 전날 집에 가면서 책방 안으로  벤치를 넣어 두었다.

아침에 일어나 얼른  밖을 보니 가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문득 벤치를 어째야 하나 고민되었다.  비가 오니 그가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만약 책방 앞까지 왔다가 의자가 없어서 불편하면 미안할 것 같았다. 부지런히  책방에 와서  비가 그치길 바라며 벤치를 밖에 내다 두었다. 그리고 안팎을 몇 번 들락거리며 물기를 말끔히 닦아 놓았다  그가 올 시간 즈음에  나는 손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먼발치서 힐끗 보니 언제 왔는지 벤치에 앉아있는 그가  보였다. 다행히  비는 그쳐 있었다. 손님이 가시고 나는 얼른 밖으로 나갔다

이제는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문을 열고 나오자  그는  나를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나는  비에 의자가 젖어  혹시  차갑지  냐며 말을 건넸다. 그는  서둘러 마스크를 내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약간 어눌한 발음으로


"고맙습니다. 의자가 여기 있어서 아주 편합니다"  한다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소업체를 운영하며  건강도 못 챙기고 정신없이 살다가 어느 날  뇌졸중이 왔노라고 재활치료를 꾸준히 해서 이렇게 걷는 정도는 되었는데  아직도 몸의 왼쪽 부분이 마비가 심해서 운동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저희 집은 저기 아래쪽인데 슬슬 걸어서 벤치까지만 오면  딱  좋아요. 가끔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고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 낙담도 되지만 마음을 고쳐 먹는 거지요. 살아야 하니까요. 이제는 뭐든 간에 예전처럼  욕심을 내고  무리하게 살지는 말아야지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요. 몸은 힘든데 마음은 편해진 듯해요. 운동도 너무 과하지 않게  슬슬 책방까지 다녀오자는 마음으로 매일 오는 겁니다. 요즘 제 목표는 그냥 책방 벤치예요 "


'욕심 내지 말고 벤치까지만'이라는 그의 작은 목표가 듣기 좋았다.  누군가에게 책방의 벤치도 목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큰 평수의 집, 큰 차, 좋은 직장이나 갖가지 현란한 스펙들을 목적으로 삼는 요즘 세태에 변두리 책방의 벤치가  일상의 목적이 되었다는 것이  오히려 더 가치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 추우실 텐데 안으로 들어가 몸을 좀 녹이라는 나의 권유를 한사코 거절하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말했다.


"내일 또 벤치까지만 천천히 오겠습니다. 내일 봬요"


몸의 균형이 깨져 살짝 흔들리며 가는 그의 뒷모습이 나는 이상하리만치 단단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그는 왠지 생의 비밀을 깨우친 초야의 고수 같았다.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며 책방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펼쳐진 노트 위에 이렇게 써보았다.


나의 벤치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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