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네팔로 여행을 갔다가 처음 맛을 보았다. 수도인 카트만두에서 봉사를 하며 숙식을 제공받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일하시는 쿠마리 할머니가 아침마다 찌아를 가져다 주셨다. 시간은 오전 5시 30분.
잠이 덜 깨어 정신도 못 차리고 있건만 매일 같은 시간에 문 앞에 오셔서 다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 나마스떼 ~"
나를 부르는 소리다. 아직 자고 있는데... 공복에 달달한 밀크티를 마시라고 부르시는 거다. 하지만 할머니의 정성을 마다할 수 없어서 얼른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문을 열면 너무 환하게 웃으신다. 몸을 약간 숙이신 상태로 예의를 갖추어 두 손으로 공손하고 정성스럽게 건네주시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사흘 정도 찌아를 받아 마시고는 이제는 주시지 않아도 된다고 정중히 사양했다. 찌아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 속에 우유가 들었기 때문이다. 네팔은 세계 3대 빈민국으로 모든 물자가 턱없이 부족한 나라다. 전기가 수시로 끊어져 낮에 부지런히 일을 하고 밤에는 잠을 자는 것 밖에 할 게 없을 정도였다. 물도 같은 상황이어서 샤워를 맘 놓고 한다는 건 사치라고 할 수 있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연히 콜라나 우유 값이 비쌌다. 그럼에도 나를 위해 적은 돈을 쪼개고 아껴가며 우유를 사서 끓여 오시는 것에 대해 맘 편히 먹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찌아 조공은 내가 네팔을 떠나오는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자신들을 찾아온 고마운 이방인에게 해줄 게 그것뿐이 없다는 것이 그녀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매일 아침에 일어나 배부르게 찌아를 한 사발씩 마셨다.
내가 지냈던 곳은 자녀에게 버림받은 할머니들이 사는 양로원이었다. 장애를 가진 분들도 있어서 손이 많이 갔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안에는 평화가 있었다. 나는 그 점이 참 좋았다. 슬픔이나 분노, 억울함, 불평이나 불안 같은 게 느껴지지 않는 뭔가 가슴을 노곤하게 하는 안정감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고통스러워 하기보다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고요하게 지냈다. 큰 소리가 나거나 다툼도 없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은 자신들의 신에게 기도하는 것으로 문을 열고 마무리되었다. 햇빛이 비추면 따뜻한 양지에 모여 앉아 온 몸으로 햇살을 받으며 신께 감사했고,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할 줄 알았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유의 넉넉함이 저주일 수 있겠다고 말이다. 이들은 그냥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도리어 나누어 주기를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같이 지내면서 삶으로 배웠다. 어쩌면 내가 느꼈던 안정감의 정체는 욕심없는 자족에서 온 것이 아니었을까.
쿠마리 할머니는 새벽마다 일어나 기도를 마치고 나를 위해 찌아를 만드시는 것이 행복하다고 했다. 자신처럼 보잘것 없는 존재가 누군가를 위해서 아직도 뭔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게 기적이라고 말했던 분이다.
네팔에서의 한달이 훌쩍 지나고 한국으로 떠나오던 날, 문간에 서서 나와의 이별이 서운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계신 할머니께 약속 드렸다. 금방 다시 오겠노라고.
-찌아 먹으러 또 올게요.-
그러자 배시시 웃으시던 쿠마리 할머니의 미소는 참 다정하고 아름다웠다.
두 달 뒤, 나는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네팔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번에는 사랑하는 아들이 내 곁에 함께였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아침 찌아 시간 , 할머니가 어김없이 문 밖에서 나를 부른다.
"나마스떼~"
그 찌아를 책방에서 만들고 있다. 책방을 준비할 때부터 가장 염두에 두었던 메뉴다. 책방에 오시는 손님들에게 찌아를 만들어 드릴 때마다 쿠마리 할머니의 마음을 더듬어 본다. 나의 공간에 찾아와 준 고마운 인연에 대한 감사와 존중. 아마 할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찌아를 만들 때는 더 애정과 정성이 깃든다. 찌아를 통해 책방에 오시는 분들과 좀 더 끈끈해지고 싶은 마음을 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