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누군가에게 한 소리 들은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을 먹은 후 여행 가방에 넣을 짐 정리를 하는데 슬쩍 다가와 볼멘소리를 한다.
“친구들이 나한테 자꾸 빵점 인생이라고 놀려. 그래도 우리 여행가? ”
역시 그랬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났다. 두툼한 등산용 양말을 챙겨 넣다 말고 아이 손을 잡으며 말했다.
“ 응, 갈 거야. 그리고 빵점 맞아도 괜찮아. 생각해 봐. 어른 된 후에 열 살 성적이 기억나겠니?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로 가는 길이 기억나겠니?”
아이는 망설임도 없이 “안나푸르나”라고 외치며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 잠깐의 소요가 일단락되고 이틀 뒤 우리 모자(母子)는 네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단 2주 정도는 지인이 운영하는 네팔 수도 카투만두의 양로원에서 보내기로 했다.
이전에도 지내던 곳이어서 내겐 익숙한 공간이다. 자질구레한 일을 돕기로 하고 숙식을 해결했다. 아이에겐 할머니들 말동무하기와 산책을 돕도록 부탁했다.
네팔 말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냐고 묻길래 네가 하고 싶은 말은 한국어로 하고 할머니들이 뭔가 이야기를 하면 몸짓으로 다시 여쭤보라고 했다. 인내심이 필요할 거라고 거듭 당부했다. 난처한 표정이 역력하던 아이는 가기 싫은 듯 발을 질질 끌며 할머니들이 모여있는 거실로 향했다. 한국인 원장님과 오래 지내서 한국어를 조금은 알아듣는다는 귀띔은 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가 뛰어오더니 할머니 한 분이 물을 달라고 한다며 신이 났다. 자기랑 말이 통한 것에 흥분한 눈치였다. 나중에는 할머니들 곁에서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깔깔대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사람 사이에는 언어를 뛰어넘는 다양한 소통 방식이 있다는 걸 아이가 알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2주는 생각보다 더 빠르게 지나갔다. 아이가 “나마스떼”라는 네팔 인사말을 입 밖으로 자연스레 뱉을 즈음 아쉽게도 다시 가방을 쌌다. 양로원 할머니들과 보낸 즐거운 시간을 뒤로하고 서둘러 남은 여정을 위해 길을 나섰다.
다음 장소는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출발지 포카라였다. 전 세계 배낭여행자들의 성지라 불리는 곳. 차로 꼬박 7시간을 달려야 했다. 온갖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한 네팔 택시는 뽀얀 먼지를 휘날리며 비포장도로를 아슬하게 달렸다. 길옆은 안전장치도 없는 천 길 낭떠러지였다. 코너를 돌 때마다 한 번씩 심장이 쿵쾅댔지만 애써 침착한 척했다.
나는 처음이 아니어서 그나마 괜찮았는데, 아이는 무서운 눈치였다. 운전사의 노련함과 우리의 운을 믿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새벽에 나서서 고단했는지 아이는 크게 요동치는 차에서도 어느새 잠이 들었다. 코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히말라야 설산이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너른 품을 열고 마치 우리를 내려다보는 듯했다. 자연의 거대한 위엄 앞에 놓이니 나의 작음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이 세상 어딘가 은밀한 안식처를 두었다면 저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이의 손을 잡으며 부디 우리를 환대해 주길 기도해본다.
“ 어머니, 얼마 후면 시험이에요. 장기간 여행을 가면 성적에 문제가 될 텐데요. 이건 생활기록부에 평생 남는 거라서, 다시 고려하는 게 나을 거예요 ”
“네, 압니다. 괜찮습니다. 빵점으로 처리해주세요. 시험 때문에 일정을 조정하거나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담임 선생님 얼굴이 살짝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더니 이내 입을 가리고 몸을 앞으로 굽히면서 작은 소리로 웃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웃어서 죄송하다며 교사 생활 15년 만에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당황도 되지만 내심 부럽다고 말했다. 본인 같으면 절대 못 할 선택이라면서 잘 다녀오라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장기 결석이 정해지고 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곧 친구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았고, 그렇게 시험점수 빵점을 예고 받은 아이는 빵점 인생으로 불리게 된 거였다, 솔직히 시험 기간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인생은 다음이 아니라 언제나 지금이다. 예전에는 떠날 수 없는 수십 가지 이유에 주저 앉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차가 포카라의 트래킹 출발지로 들어설 즘 아이를 깨웠다. 얼른 일어나 작은 배낭을 둘러매고 등산 스틱을 잡은 모습이 제법 산악인처럼 보였다. 주변의 낯섦에도 불구하고 그간 여행을 많이 해서인지 알아서 움직이는 몸놀림이 기특했다. 우리는 잘해보자는 의미로 마을 초입에 있는 허름한 찻집에서 따끈한 찌아(네팔티)를 마셨다. 찻집 앞으로 형형색색의 배낭을 짊어진 사람들이 계속 스쳐 지나갔다. 잠시 후 우리도 그 무리에 섞여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만만치 않다.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 채비도 해야한다. 해발 3천 미터 이상 올라야 하기에 습관적인 도시의 호흡과 감정으로 덤볐다간 고생길이 훤하다. 고도가 높아지니 숨은 가빠오고 땀은 비 오듯 한다. 욕심으로 배낭을 채우면 얼마 못 가 그 무게에 주저앉는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불필요한 욕망일랑 내려놔야 한다. 한 발 한 발 속도는 절제하고 깊은 숨으로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고, 자신을 진심으로 알아채야 한다.
생애 첫 트레킹에 나서는 아이의 모자를 매만져주며 힘으로 걷지 말고 편안하게 걸어라. 앞만 보지 말고 주변을 둘러보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아름다운 풍경이 우리와 동행한다는 걸 느끼면서 걸었으면 싶었다. 낯선 분들과도 가볍게 인사를 나누라고 했다.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 곁을 지나갔다. 외국인들은 우리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거나 응원을 하기도 했다. 아이가 이 모든 상황을 재미있게 즐겨주길 내심 바랐다.
트레킹을 하러 왔지만 그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저 위쪽, 정상을 오르는 것이 이 여행의 목적이 아니었다. 나는 아이에게 올라가는 과정, 그 길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우리가 겪은 많은 일, 만난 사람, 느껴진 감정을 오롯이 체험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것은 말이나 생각으로 되는 게 아니라 생생한 현장에서 마주해야만 알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이 삶을 살아가는 데 좋은 마중물이 될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몇 시간을 걸었을까. 슬슬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아이를 보니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다리 보폭이 줄어 있었다. 쉬어가는 게 낫겠다 싶어 산 아래 풍경이 훤히 내다보이는 바위에 배낭을 내렸다. 빽빽한 나무숲이 발아래로 융단처럼 깔려있었다. 인간의 힘이 닿지 않은 순수한 장관이었다. 입 밖으로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멀리 설산에서 달려왔을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한번 훑고 지나갔다. 몸은 힘든데 마음은 자꾸만 깃털처럼 가벼웠다. 물을 마시던 아이가 모자를 벗으며 이렇게 말했다.
“ 엄마, 올라올 때 보니까 여기 엄청 높잖아. 근데 마을이 있고 사람들이 살더라. 학교도 있고 놀랬어.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아이들 예쁜 교복 입은 거 봤지? 신기했어.”
“ 아들, 세상은 넓고 다양한 모습으로 사람이 살아. 각자가 선택하는 거야. 이런 척박한 산 속에 살아도 소중한 인생이잖아. 그러니까 빵점이나 백점 인생은 없는 거야. 그냥 내 인생 이지.”
아이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말의 의미를 아직은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뭔가 알듯도 했을 거라 짐작한다. 땀에 젖은 아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순간 작은 얼굴이 반짝인다. 어쩌면 눈 깜짝할 사이 아이 마음이 한 뼘 자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해가 지기 전, 숙소를 잡아야 했기에 우리는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천천히 안나푸르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 아이가 어느새 스물 세 살이다.
작년 겨울에는 제대 후 아르바이트한 돈을 알뜰히 모아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제는 엄마 없이도 잘 다닌다. 가는 곳마다 다양한 사진을 찍어 정성껏 보내주었다. 자신의 감상을 적은 짧은 문장도 함께였다. 글귀를 읽을 때마다 어느덧 진짜 어른이 되었구나. 실감했다.
그 중 유독 눈길이 간 문장이 있다. 아이슬란드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며 적은 것인데 이렇게 적혀있었다.
“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에 놀라울 뿐이에요. 오로라를 현장에서 직접 보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제 멋진 인생에 감사합니다. ”
오로라 아래 홀로 단단히 서 있는 아들 사진을 보면서 오래전 함께 안나푸르나로 가던 길이 아련히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