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게도 내가 사랑한 모든 이들은 낯선 사람이었다.
내게는 결말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몇 번이고 다시 볼 수밖에 없는 영화가 있다. 처음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시인의 페이스북 게시물 때문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라며 올린 사진 한 장에는 부스스한 머리칼과 반쯤 감긴 듯한 나른한 눈빛을 한 프랑스 여배우가 있었다. 배우의 이름은 줄리 델피였고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나온 영화가 바로 <비포 선라이즈>(1995)였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넷플릭스나 왓챠 같은 콘텐츠 스트리밍 사이트가 없었기에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유토렌트 같은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영상과 자막을 각각 다운로드해야 했다. 운이 좋지 않으면 동영상과 자막의 싱크가 맞지 않았고, 더 운이 나쁜 경우에는 자막의 상태가 엉망이었다. 그렇게 본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내가 10대 내내 남자 친구를 사귀지 못한 여러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그 영화를 본 이후로는 연애와 사랑은 중요치 않았고 삶과 죽음에 대해 밤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간절해졌다. 분명 내 생활의 전반과는 멀리 떨어진 낯선 사람임에도 나를 설득시켜 기차에서 내릴 수 있게 만드는 사람. 미국 남자 제시와 프랑스 여자 셀린이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거닐며 만나는 우연과 낭만은 두 사람이 쉴 새 없이 온갖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암소를 연기하는 연극배우, 거리에서 손금을 보는 노파, 와인 한 병쯤은 내줄 수 있는 바의 주인을 떠올리면 내가 바라는 삶은 이곳이 아닌 정반대의 세계에 있을 것만 같았다.
같은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보며 성인이 된 내가 대학에 입학할 즈음 비포 시리즈 3부작의 마지막 작품, <비포 미드나잇>(2013)이 개봉했다. 그 이후로도 이 영화의 시리즈를 개봉 순서대로 혹은 그 반대로 아니면 뒤죽박죽 마음대로. 비포 시리즈는 좋아하는 쿠키를 꺼내 먹는 기분으로 그때그때 다시 보게 되었다. 종종 술자리에서 세 작품 중에서 어떤 걸 가장 좋아하느냐는 물음을 주제로 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때마다 내 대답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역시, 두 사람이 기차에서 처음 만난 <비포 선라이즈> 가장 좋아했음을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치기 어린 젊은 날을 지나 서로의 삶과 가치관에 대해 들여다보는 <비포 선셋>과 사랑이 지난 후에 오는 권태와 현실적인 결혼 생활과 육아까지 보여주는 <비포 미드나잇>의 몇몇 장면을 다시 찾아볼 만큼 좋아하지만, 역시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나한테 사랑에 대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 <비포 선라이즈>였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하는 모든 일들이 좀 더 사랑받기 위한 게 아닐까?”라는 셀린의 물음이 “서로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확신으로 변할 때, 관객은 비엔나에서의 짧은 하루가 두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 장면이 될 것임을 직감하게 된다.
처음 본 사람을 따라 기차역에서 내린 적은 없지만 당연하게도 내가 사랑한 모든 이들은 낯선 사람이었다. 언제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 영화를 천천히 다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도 했으나 그 바람은 생각만큼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몇 번의 연애가 시작되고 끝나는 동안 영화는 늘 혼자만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었기도 했고 특히 이 영화는 아직까지는 누구와 함께 보고 싶기보단 혼자만의 낭만인 편이 더 낫다고 여겼다. 올해 여름, 비포 시리즈가 한 달 간격으로 차례차례 재개봉한다는 소식에 장마를 피해 극장에서 시간을 보내겠다 싶었다. 그 순간을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와 함께한다고 생각하니 축축하게 젖은 양말이 순식간에 바싹 마른 것 같았다. 그런데 애인이 이 영화의 제목과 내용은 익히 들었으나 아직 본 적이 없다고 했을 때는 내 발목이 물에 잠겨 고요한 소용돌이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처럼 어떠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적당히 기분이 좋으면서도 조금은 아쉬운 마음. 그와 함께한 주말 내내 나는 그가 조금이라도 피곤한 기색을 보이면 영화를 취소해도 좋다고 넌지시 말했다. 예매한 영화를 취소하는 건 우리 사이의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고 어쩌면 좌석이 불편한 상영관보다 근사한 곳에서의 안락한 저녁에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주말 저녁, 아트나인 9관에서 <비포 선라이즈>를, 몇 번이고 보았던 영화를 영화관에서는 처음 보았다. 영화를 보기도 전에 왜인지 이 영화는 아주 젊을 때, 20대 초반에 보면 더 좋았을 것 같다고 했던 애인은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자신의 예감대로 영화의 몇몇 장면이 무척 좋았음에도 아쉬운 마음이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영화 속 줄리 델피의 말과 행동이 나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대목이 많았다고 했다. 나는 이 영화를 무척 아끼고 고등학교 때부터 그녀를 깊이 흠모했으니 어쩌면 내가 그의 말투를 흉내 내는 걸지도 모른다고 말했지만 무척 기뻤다. 그에게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첫 유럽 여행을 함께한 친구에게 비행기가 아닌 유레일 패스로 이동하는 걸 고집했던 것부터 비엔나에 가 두 사람이 함께 LP를 들었던 레코드점과 첫 키스를 나누었던 프라터 놀이공원의 관람차, 그리고 서로의 진심을 장난스럽게 털어놓은 카페 스펄까지 다녀왔던 걸 얘기했다. 비엔나에 가자마자 들렀던 모차르트의 집이나 벨베데레 궁전에서 본 클림트의 <키스>나 <유디트>는 잘 기억나지 않았고, 에곤실레 사후 100주년을 기념하고 있었던 레오폴드 뮤지엄은 그나마 조금 선명했으나 역시 내게 비엔나는 <비포 선라이즈> 속 두 사람의 대화로만 가득했다. 이제 우리에게는 8월은 <비포 선셋> 그 이후로는 <비포 미드나잇>의 재개봉이 남아 있고, 나는 영화관에서 나와 파리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에 대해 얘기하겠지. 그럼 순한 애인은 지금의 내가 아닌 미래의 나를 상상할 것이고 나는 내게서 멀어진 과거의 한 순간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게 가장 미련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화 주제
■ 영화나 드라마에 나온 장소를 직접 찾아간 경험이 있을까요?
■ 저는 이번 여름을 '비포 시리즈'와 함께 마무리할 예정인데요. 우리가 좋아하는 시리즈가 참 많잖아요.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 마블 시리즈까지.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시리즈가 있다면 무엇이고 지금도 종종 찾아보는지 궁금해요.
■ 오늘 일기에서 <비포 선라이즈>를 소개한 건 이번 재개봉을 청취자 분들도 놓치지 않았으면 해서였는데요. 혹 추천하고 싶은 콘텐츠가 있을까요? 오랜만에 영업을 해봅시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3. 소진
낮에는 책을 만들고, 밤에는 글을 씁니다.
그 사이에는 요가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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