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에 대해 쓸 수 있어"
긴 여름, 사이사이 만나는 사람마다 날씨 이야기를 했다. 지난주에는 거제 잔디밭골의 색 바랜 수국이 목을 떨구고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제 추석 연휴도 다 지나고 9월도 중순에 접어들었는데 네가 아직도 여기 이렇게 있으면 어떡해. 빛이 빠져나간 꽃의 안위를 살피다가 이미 8월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는 그 애의 말이 생각났다. 그곳은 내가 갔을 때도 비가 내리는 날이면 두꺼운 기모가 들어간 후드집업을 걸쳐야 했으니 지금 눈이 내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구나 싶으면서도 아직은 조금 이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너무 춥고 벌써부터 겨울이 온 것만 같다는 말에 한국은 여전히 덥고 아직은 여름인 듯하다고 답했다. 한 사람은 매일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말을 타러 갔고, 다른 한 사람은 다시 에어컨 아래 앉아 주어진 원고를 읽어나갔다.
처음에는 간단한 인사말과 자기소개 그리고 숫자 세는 법에 대해 알려주었고 그다음에는 각자 번역기를 사용해 대화를 이어나갔다. 번역기는 빠르지만 부정확했고 지금 하는 생각을 전달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음에도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에게 필요한 말이 도착했다. 겨울의 몽골은 너무 추울 것 같다는 말에 시골에 가면 불이라도 피워주겠다는 답을 받았다. 을지로에서 내려 필름을 맡기고 충무로까지 걸어가는 길이었고 옆에는 아무도 없었음에도 캡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초원에서 말을 타는 사람에게 불을 피우는 일은 아주 간단한 일일지도 몰라,라고 되뇌면서도 불을 피우는 사람의 모습을 자꾸만 상상하게 되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대해 말하자 비 내리는 건 아름다운 것 같다고, 우산을 쓰고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비 맞는 걸 싫어한다는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러 가는 길이었고 나와 같이 비를 좋아하는 이에게 혹 비를 맞는 것도 좋아하느냐고 물으려다 참기도 했다. 내가 작업하는 책을 읽고 싶다고 말했을 때는 나조차 이해하지 못한 시에 대해 읽고 설명하는 걸 상상하기도 했다. 서로가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어쩐지 크게 다를 게 없는 한국과 몽골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보면 그가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나와 너무도 멀어진 것만 같은 결혼과 출산과 같은 미래나 나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전쟁과 기후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는 짧게 공감하고 이내 몽골에서처럼 삶의 고삐를 꽉 쥐여 주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행복이라고 말했다. 나와 친구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친구나 가족, 직장이나 일상에서 벗어나서도 나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낯선 이와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아주 긴 대화를 나누었고 9월이 된 이후로 나는 내내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연락을 삼간 채 내내 기다리기만을 했다. 서운했다는 말이 화났다는 말로 번역된 순간부터 말을 먼저 건네는 게 어려워졌다. 마치 여름 캠프에서 반짝 만나 서로의 일상으로 돌아간 친구처럼 서로의 시간을 존중한다는 말로 점점 더 간단한 안부만을 묻게 되었다. 이 모든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쉬웠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번 여름이 길었다고 하는데 왜인지 내게 여름은 날씨와는 무관한 일처럼 여겨졌다. 한국도 조금 추워진 것 같다고 하자 옷을 따뜻하게 입어야 한다는 단호한 답이 왔다. 그 친구에게 일기에 너에 대해 써도 되느냐고 물었고 그는 "너는 나에 대해 쓸 수 있어"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쓴 한국어로 된 일기를 보내고, 아무렇게나 번역될 몽골어 일기를 하나 더 보내고, 마지막으로 한국말로 녹음한 음성 파일을 보냈다. 똑같은 일기를 세 가지의 방법으로 보낸 후에야 어쩌면 번역이 되지 못한 것들이, 서로에게 말 대신 건넸던 호의가 더 순하고 다정하단 생각이 들었다.
대화 주제
■ 이번 여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언제이고 누구와 함께했나요?
■ 여행지에서 낯선 이와 친구가 된 경험이 있나요?
■ 예상치 못한 순간에 위로를 받은 적이 있다면 언제이고 그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3. 소진
낮에는 책을 만들고, 밤에는 글을 씁니다.
그 사이에는 요가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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