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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Dec 05. 2024

70. 일기떨기: 소진의 밀린일기

“소진아, 어디야? 우선 집으로 얼른 들어가. 계엄령 선포됐어.”




연극 <타인의 삶>을 보고 나오는 길, 국가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980년 5월의 일기가 아니고 2024년 12월 3일의 일이다.     


 최근 독서 모임에서 독일 통일 직후의 베를린을 베경으로 한 모니카 마론의 『슬픈짐승』을 다시 읽은 나는, 몇 해 전 한 시인의 추천으로 본 영화 <타인의 삶>을 다시 보게 되었다. 냉전 시기 독일은 서독과 동독으로 나뉜 채 정치적인 갈등을 빚으면서 전혀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아간다. 영화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년 전을 배경으로 동독 예술가들의 삶과 이들을 감시하는 비밀경찰 슈타지를 보여줌으로써 인간 삶의 존귀함에 대해 말한다. 비밀경찰 ‘비즐러’는 당국에 충성하는 철저한 사회주의자로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와 그의 애인이자 연극 배우 ‘크리스타’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동독 사회의 철저한 감시 아래 억압된 상황 속에서도 예술을 향유하고 서로를 애틋하게 사랑하는 이들을 보면서 신념에 의해서만 움직이던 비즐러는 차츰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드라이만의 집에서 가져온 브레히트의 시집을 읽기도 하고 나중에는 동독 사람들의 처절한 삶을 서독 잡지에 폭로하는 칼럼을 쓰는 드라이만을 끝까지 보호하기도 한다. 한동안 이 영화에 감화된 나는 인간의 모든 실수는 타인에 대한 공감의 부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왔다. 연극 <타인의 삶>은 영화가 말하는 메시지를 온전히 전달하면서도 몇몇 장면의 대사를 각색해 또 다른 울림을 주었다. 나는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진실된 마음으로 존중하고 믿어준다면 결코 내 삶은 망가지지 않을 거란 믿음을 안고서 이 작품을 연극으로 다시 한번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영화를 추천했던 시인과 연극을 보고 나와 맥주를 마시고 돌아가는 길, 애인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소진아, 어디야? 우선 집으로 얼른 들어가. 계엄령 선포됐어.”


 연극을 보고 나온 지 약 1시간이 지난 뒤 10시 30분경이었고 그 순간 1980년의 광주 1984년의 동독 그리고 2024년의 서울이 겹쳐지면서 혼란스러웠다. 오늘날은 집안 곳곳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지 않아도 인터넷망으로 감시를 받을 수 있는 시대라는 것과 시대와 역사를 역행하는 비현실적인 발언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지하철 안은 여느 때보다도 고요했고 모두가 각자의 휴대폰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이후 45년 만의 비상계엄 선포였다. 오로지 국민을 위해 모든 것을 통제하고 금지하고 조치하겠다는 말은 철저히 자신의 안전만을 위한 사람의 발악이나 다름없었다. 윤석열이 6시간 만에 계엄 해제를 선언하기까지 나와 동료들은 밤새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라는 눈과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말을 곱씹었다. 내가 사랑하는 내 삶과 예술 그리고 의심치 않았던 자유에 대해서 생각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동안 몇몇 시민들은 국회 앞을 지켰고 마침내 계엄군이 철수하자 환호했다. 하지만 이 참혹한 밤을 지나오면서 모두가 알았을 것이다. 더는 6시간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고 이 치욕을 잊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헛된 망상에 사로잡힌 채 자기 자신을 수호하기 위해 국민의 자유를 위협하고, 일상을 마비시키고, 삶 자체를 뒤흔들려고 한 윤석열은 철저한 조사와 정당한 처벌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


 <타인의 삶>에서 드라이만은 "아름다운 영혼의 소나타를 진정으로 들은 사람이면 나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이가 내 삶에 대해 염려하고, 존중하고, 사랑하기까지 했다면 우리는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각각의 삶에 충실한 이들을 무참히 짓밟고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돌아보지 못하는 윤석열은 타인의 삶에 대해 단 한 번도 진지한 적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삶과 예술 그리고 사랑이 타의에 의해 검열되거나 훼손되어선 안 된다는 것을, 그거야말로 인간이 가장 기본적으로 누려야만 하는 자유라는 것을 모르는 이에게 더는 목소리를 내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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