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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Dec 16. 2024

71. 일기떨기: 혜은의 밀린일기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여느 때처럼 책방으로 출근하는 토요일. 씀이 가까워질수록 창가를 마주하는 내 자리의 요란함도 가까워진다. 유리벽을 보드판 삼아 내가 좋아하는 것, 그래서 가까이에 두고 싶은 것들을 잔뜩 붙여놓았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계절마다 찍은 사진, 가장 존경하는 작가님 책의 띠지, 선물 받은 그림, 여행지에서 산 엽서, 외우고 싶은 문장이 담긴 책갈피, 최애의 사진과 가사… 한 독자는 책방에 놀러왔다가 내 자리를 힐끔 보더니 물었다. “여기가 작가님이 좋아하는 것들을 모두 모아놓았다는 곳이죠?” 전부는 아니지만, 전부를 담아두고픈 마음으로 유리벽을 채우고 있는 것도 맞았다.


 안쪽에서 보면 와글와글 소란하게 나를 감싸고 있는 것들이, 씀을 여는 출근길이나, 마감을 하고 한번 더 뒤돌아보는 바깥에서는 모두 깨끗하게 하얀 뒷모습을 하고 있다. 가끔은 그 벽이 나를 지켜주는 보호막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유리벽에는 딱 하나, 앞 면이 바깥을 향하고 있는 엽서가 있다. 바로 ‘미래’라는 엽서다. 서로 다른 흰 뒷모습들 사이, 파랗고 굵은 폰트로 ‘미래’라는 글자가 홀로 밖을 바라보고 있는 모양이다. 미래는 아무래도 안쪽보다 바깥을 향하는 편이 나으니까, 고민하며 돌려두었던 것 같다. 미래는 나 홀로 안온하게 앉아 있는 자리보다는,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다 한 번이라도 눈을 마주칠 수 있는 곳이 더 어울리니까. 미래는 그렇게 다양한 시선이 모여 변해가는 것일 테니까.


그 엽서는 작년 도서전 때 창작과비평 부스에서 받아온 것으로, 뒤집으면 이런 글이 발췌돼 있다.


“사실 우리는 미래가 어떨지에 관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기후위기에 대한 외면이 가져올 결과, 남북관계의 파탄이 야기할 비극, 그리고 그보다 가깝게는 이 정부의 지속 불가능함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미 ‘회귀’한 사람들이며, 미래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확신으로 현재를 바꿀 수 있다. (…) 이제 잠깐의 좌절을 털고 서로를 격려하며 이미 시작된 크고 작은 싸움들을 북돋을 시간이다.” 

ㅡ 황정아, 「미래에 관해 알고 있는 것들」, 『창작과비평』 2023년 봄호 중에서.


 12월 3일 포고령의 밤과 계엄해제의 새벽을 보낸 뒤 출근하는 수요일을 지나 목요일, 금요일, 그리고 조기퇴근의 토요일이 오기까지. ‘미래’ 엽서의 앞면과 뒷면을 바라보았던 마음을 기억한다. 이런 안쪽을 바라보며 살다 보니, 결국 바깥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어떤 언어는 사람을 가두고 멈추게 명령하지만 어떤 언어는 사람을 살리고, 살고 싶은 세상을 가리키게 이끈다. 그리고 약 보름 간의 집회 현장에서 울려퍼진 고운 목소리들, 목소리를 채운 노랫말을 곱씹을 때마다 어떤 언어가 나를 강하게 만드는지 사무치게 깨달았다.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이 가사 속의 ’너‘는 오랫동안 내게 미지의 단수, 미지의 주어였는데. 무한히 증식되는 ’너‘들을 상상할 수 있는 겨울이었다. <다시 만난 세계>는 왜 이렇게 슬플까? 이 노래와 함께 엄청나게 강해져보았던 거리를 떠올려보니 알겠다. 강해진다는 건 지키고 싶은 게 있다는 것, 지키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게 되고, 슬퍼지는 대신 더 소중히 지키기 위해 강해지려 할 테니까. 그러니 무작정 강해지기를 바라는 사람, 거침없어 강해지려 하는 사람일수록 그는 지키기보다 소중한 무언가를 파괴하고 싶어하는 사람일 것이다.


앞으로도 이 노래를 울컥하지 않고 듣거나 부를 수는 없겠지만, 지금 기록되고 있는 이 역사가 우리 근대사에서 마지막으로 반복되는, 오직 극복으로만 기록되는 역사이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먼 훗날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듣는 아이들의 미래는 언제나 새로 만난 세계뿐이길. 그 미래로 향해가는 오늘이다.




화 주제

■ 이번 집회는 (기존에도 이어져온 기조이지만) 젊은 여성들의 참여를 많은 이들이 발견하고 집중할 수밖에 없던 풍경이 있었죠. 탄핵 집회 속 기억에 남았던 풍경, 현장을 전해준 이들의 목소리 등을 나눠볼까요.

■ 탄핵 가결에 이르기까지 나의 일상은 어떻게 흔들렸고, 또 유지되었는지. 나아가, 헌재의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그리고 새 대통령이 선출되기까지 구만리처럼 남아있는 우리 앞의 시간들을 향한 응원~~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1. 혜은

『아무튼, 아이돌』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매일을 쌓는 마음』『우리들의 플레이리스트』를 썼습니다.

  망원동 '작업책방 씀'에서 다음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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