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기떨기 Aug 16. 2023

44. 일기떨기

더 이상의 변화 없이 그 상태 그대로.


오전 11시 49분. 시선을 모니터에 고정한 채로 서랍장 맨 위칸을 연다. 이제는 이곳저곳 뒤적거리지 않아도 손만 뻗으면 바로 손목시계를 찾을 수 있다. 카시오라는 브랜드의 전자시계. 내가 직접 구매한 건 아니고 여동생이 피시방 아르바이트를 할 때 손님이 두고 간 것이다. 예대 앞 피시방에서 꼬박 2년을 일하는 동안 분실물로 보관함에 고스란히 두었는데 끝끝내 주인이 찾아가지 않자 사장은 동생이 그만두는 날 이 시계를 선심 쓰듯 줬다고 했다. 누가 쓰던 건지도 모르는 시계는 애물단지처럼 집 안 이곳저곳을 굴러다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이제는 나한테 꼭 필요한 물건이 되어버렸다. 11시 50분에 그 주인 모를 시계를 차고 요가원으로 간다. 출근할 때 입고 온 티셔츠 차림 그대로 레깅스만 갈아입으면 얼추 12시 정각에 맞춰 수업에 들어갈 수 있다. 그때부터 약 55분간 수련을 하고 정규 수업 시간보다 15분 일찍 나와서 사무실로 복귀한다.


어느덧 점심요가를 한 지도 반년에 접어들었고 지난주에 6개월치 수강료를 한꺼번에 지불했으니 당분간 이 루틴에는 변함이 없을 것 같다. 일주일에 최소 네 번, 저자 미팅이나 행사 일정이 없는 날이면 점심시간에 요가를 한다. 점심 그리고 요가 이렇게만 보면 직장인 신분으로서는 꽤나 근사한 일상인 듯한데, 실상 요가원에 가서는 내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다 한숨만 푹푹 쉬고 돌아올 때가 많다. 그런 내가 주말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점심시간마다 요가원에 간다고 하면 돌아오는 질문은 대부분 비슷하다. "요가 시작하고 좀 달라진 것 같아?" (달라진 건 없습니다만) "그럼 머리서기도 할 수 있겠네?" (그럼 좋겠습니다만) 질문의 내용은 조금씩 달라질지언정 그 맥락은 똑같다. 그래서 너 지금 요가하기 전이랑 후, 뭐가 달라졌어?


결론부터 말하자면 달라진 건 없다. 이건 애초에 지금의 나를 바꾸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 아니니까. 그냥 하면 좋을 것 같아서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지금껏 목적 없이 '그냥' 궁금해서 시작한 일이 참 많다. 비 내리는 콘서트, 지역의 영화제, 제과제빵 실습, 퇴근 후의 주짓수 그리고 내가 지나쳤던 여행지들까지. 오래 고민하고 결단 내리듯이 행한 건 없고, 순간적인 충동에 의해 결정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때때로 나의 이러한 태도가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건 아닌지, 실은 잘 해낼 자신이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언제든 도망칠 수 있는 구실 혹은 임시방편이 아닐까, 하고서.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 중 하나 역시 '지속 가능한 삶'에 관한 것이다. 뭐든지 금방 질려하는 내가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 언니들과 일기를 쓰고 대화를 나누는 동안 '퇴근하고 주짓수 하는 편집자'에서 '주말마다 제빵 하는 편집자' 그리고 '점심시간에 요가하는 편집자'가 되었더. 모두 그냥 시작해서 그냥 끝내서인지 내내 마음에 남고 언제 또 '그냥' 시작할 수 있을지 궁리하게 되는 것들이다. 주저리주저리 목적 없이 요가를 하고 있다는 근황을 전하는 동안 지금 하는 모든 것들을 '그냥' 하다가 '그냥' 그만두어도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그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게 되었다.


그냥 (부사)  

     더 이상의 변화 없이 그 상태 그대로.   

     그런 모양으로 줄곧   

     아무런 대가나 조건 또는 의미 따위가 없이.


그냥 하고 있다는 것, 그냥 좋아한다는 것, 그냥 그만두어도 된다는 것 모두 참 근사하다고 생각하니. 요가를 그냥 그런대로 잘하고 있는 게 가뿐하게 다가왔다.


대화주제

■ 요즘 하고 있는 운동 혹은 일상의 루틴에 대해 알려 주세요.

■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몰두하고 있는 게 있나요?

■ 충동적으로 시작한 일 중에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게 있나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3. 소진

낮에는 책을 만들고, 밤에는 글을 씁니다.

그 사이에는 요가를 하고요.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매거진의 이전글 43. 일기떨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