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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Sep 12. 2023

45. 일기떨기

이 놀랍도록 귀엽고 과연 나를 닮아 있는 것이 분명한 친구는 누굴까


혜은의 밀린 일기

9월 9일 토요일. 막막했던 작업이 조금씩 풀려갈 즈음, 지현이한테서 연락이 왔다. 합정에서 글을 쓰다 망원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마포 일대를 돌아 다니며 작업하는 하루를 보내던 지현이의 그날 마지막 작업 장소는 그렇게 씀이 되었다.

누군가 씀에서 자신도 모르게 필요했던 책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언제부턴가 글쓰기가 간절한 누군가의 작업 공간이 되는 것을 좋아한다. 가끔 테이블에 둔 방명록을 밀려 읽다 보면, 익명의 손님들이 남몰래 저마다의 작업을 조금씩 채우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한다.

이 공간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내 것이기만 한 공간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정말로 그러하다는 사실이 차곡차곡 쌓일 때마다, 반갑고 왠지 힘이 된다. 구체적으로 어떤 힘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뭔가를 지속하게 하는 힘이지 않을까 싶다. 나의 남은 작업으로 돌아가게 힘,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이곳을 유지하게 하는 힘.

지현이가 온 날은 근래 만난 주말 중 가장 바쁜 토요일이었다. 손님들이 끊임없이 왔다 갔고, 그중 많은 손님이 실구매자였다. 지현이에게 커피를 내려주고, 쿠키를 나눠 먹고, 스트레칭을 하고, 서가 사이로 지현이의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다시 내 키보드를 두드리기를 반복하는 사이 해가 저물고 마감 시간이 되었다. 나는 친구가 놀러온 날 바쁜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한량 사장인데, 왠지 이날은 씀의 분주함에 조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은 잘 나가는 언니처럼 보이고 싶어서였을까?

너무 작위적으로 보일까 봐 지현이한테는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마침 최근에 일기를 쓰다 사로 잡힌 오래된 일기 중에는 문어뱅스 친구들이 나 대신 씀을 지켜준 하루가 있었다. 그때 우리는 얼굴도 본 적 없이 소진을 통해서 서로가 얼마나 닮아 있는지에 대해서만 들은 사이였는데. 그래서였을까. 지현이는 깍듯하게 존댓말을 쓰면서 이런 깜찍한 편지를 남겼더랬다. “어쩐지 작가님을 떠올리면 언제고 제 삶에 소중한 인연이 될 분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이 놀랍도록 귀엽고 과연 나를 닮아 있는 것이 분명한 친구는 누굴까… 생각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서 어느새 지현이가 나를 언니, 언니, 부르면서 열심히 작업하고 있는 모습이 좋았다. 내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은 기분이 뭔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이날의 나는 꼭 그랬으니까. 마음은 꺼내놓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지현이에게 오늘 너가 와서 정말 좋다고 말해주었다.

함께 저녁을 포장해와 먹으면서는 요즘 갖고 있는 작업에 대한 고민들, 익숙한 오늘을 대하는 데 부치는 마음들을 나눴다. 아. 방금, ‘저녁을 포장했다’는 말을 쓰고 정말 그런 날이었다고 생각했다. 서로에게 다 털어놓을 수는 없는 사정들이야 있겠지만, 이날 가장 시급하게 달래고 싶은 것, 이날 가장 버거웠던 것을 툭 내려놓았다가 다시 내일로 잘 데려갈 수 있게 소중히 포장하는 데 성공한 것만 같아서.

그러고 보니 다짐을 나누고 근거 있는 확신을 채우는 순간이 제법 있었다. 혼자 있을 땐 절대로 불가능하리란 생각에 사로 잡히고,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조금은 체념한 채 걸어가고 있는 시기였는데. 요 며칠 씀 테이블에 앉아 작업하고 돌아갔던 친구들과 나눈 얘기들은 ‘요즘의 나‘가 맞나 싶을 만큼 생기가 있다. 그러니까, 모두 다 실현될 것만 같다. 말에는 힘이 있으니까. 일기떨기에 긴 일기를 낭독하면서 조금 더 힘을 보태 본다.

끝으로. 우리가 닮아 있음을 느낀 순간을 남기며 일기를 마무리해본다.

그날 저녁. 지현이에게 전할 말을 고른 뒤 “있잖아 내가 정말 좋아하는 말인데~”라고 운을 떼다 웃음이 났다. 보통 친구들과 이야기할 땐 그렇지 않으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좋아하는 작가님의 말이나 글을 인용하는 게 너무 쉬워서 웃었더니 지현이가 더 기대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글을 쓰는 어려움에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으면서도 속에선 뭔가 조금씩 살이 찌고 있는 것 같은 보람을 느꼈다.”

내가 박완서 선생님의 말씀을 들려주자, 지현이는 김소연 시인의 말로 응답했다.

“한 사람이 불면의 밤마다 살아서 갈 수 있는 한쪽 끝을 향해 피로를 모르며 걸어갈 때에, 한 사람은 이불을 껴안고 모로 누워 원없이 한없이 숙면을 취했다. 이 두 가지 일을 한 사람의 몸으로 동시에 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날은 피로를 모르며 걸어가기로 한 하루. 우리는 다시 각자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대화 주제     

 최근 친구와 함께 했던, 즐거운 하루에 대해 들려주세요.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만나고 싶은 친구가 있나요?

 친구, 하면 생각나는 책이나 영화 드라마가 있나요?

 가을에 기대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1. 혜은

『아무튼, 아이돌』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을 썼습니다.

  망원동 '작업책방 씀'에서 다음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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