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
겨울의 캠퍼스를 가로질러 일터로 가는 길, 이른 출근의 여유로 잠깐 들어간 도서관에서 우연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보았다.
어릴 때 그 책 제목은 몇 번의 되뇜 만으로도, 내 안의 밀가루 반죽 같은 생각을 끊어지지 않는 국수처럼 뽑아 올리게 하는 묘한 끌림을 주었었다. 그렇지만, 난 굳이 책을 열어 읽지는 않았었다. 첫 성을 경험하기 전에 그것은 얼마나 환상적이고 무한한 상상의 원천이었던가? 나는 그 책제목이 주는 묘한 아우라 만을 즐기기 위해 열지 않았던 것 같다.
제일 많이 한 생각은 참을 수 없는 것이 존재인지 가벼움 인지였다. 저자의 원래 생각이 무엇 인지와는 무관하게, 언뜻 언뜻 느껴 놀라움을 주는 '내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나라는 것, 나를 나라고 할만한 무언가가 마음에서 엷어지고 주위가 그저 흘러가고 스쳐오는, 나라고 할만한 어떤 것은 공중에 붕 떠서 약간의 미소로 담담히 보는' 그런 '가벼움' '존재'같은 것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그 책이 실제로 내 옆에 있어도 그냥 지나쳐 버린 순간이 많았는데, 오늘 도서관의 시각에 다시 사념을 설사하게 된 것은 아마도 요 몇 년간의 직업 때문인 것 같다.
외래 공간에선 짧은 순간에 많은 사람들이 흘러 오고 흘러 간다. 그들의 희로애락이 처음엔 내 나름대로의 가공을 거쳐 오갔지만, 요즘은 거의 날것의 파도가 되었다. 그 파도 가운데 무인도 같은 공간이 바로 이 직육면체의 수술 방이다. 그들 가벼운 존재는 실력 좋은 동료에 의해 무거운 육체와 분리되고, 작은 손들에 의해 재 정열 되는 침묵과 음악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많은 이가 오가는 파도는 내게 낮과 같고, 직육면체의 무인도는 밤과 같다. 어떤 때는 낮이 참을 수 없고 어떤 때는 밤이 그렇다. 인내와 상관없이 밤 낮은 꼬리를 물고 돌고 돈다. 이런 밤낮이 계속될수록 특유의 나는 점점 희미하고 옅어지겠지.
얇은 미소로 이 과정을 지켜보면 주위가 내가 되는 것인지 내가 주위자체가 되는 것인지 조금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스스로 글을 쓰면서, 점점 가벼워 지려는 관성에 힘들여 맞서는 이유는 '난 아직도 누구의, 혹은 누군가의 무엇'이라는 책임감 때문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