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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평화 Dec 25. 2015

사람이 사람을 사람하다. 열이틀

사랑이...

  집으로 걸어오고 있다.

 조금 차가워진 밤공기가 내리다 그친 빗줄기의 습기를 머금은 채로 뺨을 만지고 지나간다. 오른쪽으로는 노랗고 빨간 네온사인이 켜져 있고, 왼쪽으로는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이 내 구두 발자국 소리를 덮고 지나간다.

 

 비가 내린 직후에는 늘 젖은 진흙냄새가 나고, 그 냄새는 달달한 침이 입안에 고이게 한다. 오감의 감각이 지금의 시각에 많은 형용사를 지닌 하나의 감성을 생성한다.


 이 감성은 과거의 40년 가까운 시각 시각에 경험했던 내 오감의 경험이 유도한 것이다. 나와 다른 오감의 경험을 가진 어떤 사람이 이 시각, 공간에 있다면 그는 나와 다른 감성을 체험했을 것이다.

 만약 오감 중 한두 가지를 갖지 못한 선천적 맹인, 농아 같은 장애인은 어떤 감성을 체험했을까? 아예 시각의 정밀도, 청력 주파수의 범위, 냄새분자의 민감도 등이 다른 어떤 동물은 또 어떤 감성을 체험했을까?

 하나의 현상에 대해 모두가 다르게 체험한다면 그 ‘하나의 현상’은 실존하는 모습인지, 또 실재로 존재하는 지 조차 알 수가 없다.



 내 모든 인식은 현상의 표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즉, 내가 오감하고 감성 하는 사물은 그 자체로 인식 되는 것은 아니고, 사물의 관계 그 자체도 내 안에서 오감 되고 감성 되는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현상으로 내 안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이 내 감성의 모든 수용성에서 분리되었을 때 그 자체가 어떠한 성질인가 하는 것은 알 수가 없다. 나는 대상을 지각하는 인간 특유의 방식밖에 모른다.

 이 방식은 모든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모든 존재자들이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의 시각은 밤이 어둡다고 인식하지만 빛의 파장에 감수성이 다른 부엉이 같은 존재는 밤이 어둡지 않을 것이다.


 정말로 실존하는 것을 찾으려면 경험의 편견을 모두 제거해야 할 것이다. 먼저 오감에서 유추되는 감성을 없애고, 오감마저 없애면 남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다. 내가 인식하는 오감과 감성은 현상이 있고 그것에 대한 반응하는 것이므로 인과관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나는 날 때부터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인식하고 있는 내적인 나와 분리된 대상이 거기 있기 위해서는 나와 분리된 공간이라는 개념 또한 이미 아는 개념이었을 것이다. 물론 공간을 인식하는 내재적인 나의 시간적 과정을 인과관계로 볼 때 공간 또한 시간에 종속된 개념일 것이다.



 초당 30만 킬로를 가는 빛 옆에서 초당 20만 킬로를 가는 우주선을 타고 있는데도 우주선에 탄 사람이 빛을 보면 빛의 속도가 초당 10만 킬로를 가는 것이 아니라 초당 30만 킬로로 움직이기 때문에 속도=거리/시간 이라는 공식에 의해 시간이 그 만큼 느려진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시간의 절대성 마저 부정한다.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빛 조차도 입자인 물질이면서 동시에 파동이고, 입자는 그 시각에 거기에 있을 수 있지만 계속 흐르는 시간의 속성상 어떤 공간에 구름처럼 양자 혹은 편재되어 있다.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고 그 시간의 대상인 공간에서 인식되는 빛과 입자 또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런 혼란은 시공간이 실재한다고 인식하는 ‘나’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나라고 하는 집착을 끊을 수 있다면 우주 그 자체가 될 수 있을까? 그런 방법이 있을까?


  자살이라는 방법은 물질로서의 육체만 분해될 뿐 그 육체를 소멸 생성시키는 혼의 집착을 소멸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강화시키기에 가장 나쁜 선택이 될 것이다.

 

 명상과 묵상으로 오감을 철저히 제거하는 훈련을 한다면 혼이 집착에서 자유로워 질 것인가? 여기서 나는 기대한다. 이미 나를 벗어나 우주가 된 사람의 말과 행동을 쓴 “해탈의 정석” 같은 책이나, 믿기만 하면 나를 여기에서 저기로 휘리릭 끌어올려줄 절대적인 존재를 열망한다. 주변에서 그런 책은 불경이나 성경일 것이고, 절대자는 하느님일 것이다. 반야경은 고집멸도의 믿음과 팔정도의 소망, 그리고 자비라는 사랑을 강조하였고, 바울이 고린도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쓰여있다. 사랑…… 사랑……


 일상과 일상 사이에서 문득 진리에 대한 갈구와 감동을 느끼지만 내 일상 생활의 99.999%는 내 오감이 또 감성이 즐거워지기 위한 행동의 연속이다. 물론 끝내 허무함과 고통임을 알기에 진리를 찾게 되지만 오래가지 않고 이기적 혼의 지배를 받는다. 현상자체를 받아들이는 자세를 낙관적으로 하여 아름다운 세상에 소풍 나온 듯이 살려 해도 진리의 미세먼지 한줌을 이미 알고 있어 그마저 불가능하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그 오감과 감성으로 일생 동안 체험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본다. 싯다르타가 고행 중에 우유를 얻어 마시며 육체를 돌보고, 예수님이 수많은 병자의 몸을 치유한 것은 육체와 혼이 진리의 방해꾼이라는 것이 편견임을 보여주는 날카로운 지적일 것이다.


 

 내 육체와 혼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내가 자연스럽게 없어질 수 있는 방법은 사랑 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장애를 지닌 할머니의 항문을 깨끗이 닦아드리고, 우는 아들을 달래려 오랫동안 업어 달래면서, 또 힘들고 아픈 사람들이 소리쳐 호소할 때 같이 울면서 잠깐이지만 나는 얇아졌고 또 기쁨으로 찼었다.


사랑이란, 지극히 세속적인 종류에서조차도 본질적으로는 희생이고 기쁨이라, 나의 집착을 죽이는 환희를 잉태하게 한다..

 물론 이런 사랑은 가족에 대한, 집단에 대한 또 다른 집착을 낳는다. 하지만 나의 범위가 넓어진 만큼 옅어진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경향성을 의지를 갖고, 확대하고 체험하고 기뻐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언젠가 나의 마음은 끝없는 향연과 같아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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