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그리고 저기에서
매일 하루에도 여러 번 이 구름 통로로 여기 있다 저기로 가고 저기 있다가 여기로 온다.
"제가 오는 게 너무 싫으시죠?"
환자 사진을 보는 잠깐의 pause 동안 심사담당자가 말했다.
'삭감된 항목에 대해 소견서 좀 써주세요. ' 라며 외래 중간에 팔뚝 높이의 차트들을 기운차게 들고 오는 모습과 함께 시작된, 한숨과 고음의 대화 중간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꺼낸 화해의 제스처였다. 내 말투가 큰 고름 주머니를 양 엄지손톱으로 꾹 짰을 때처럼 피곤과 짜증이 '찍~찍..' 뱉어졌나 보다.
몇 주전 수술 받은 환자가 거액의 민원을 제기했다는 분쟁 담당자의 문자를 받은 이후로 그 농양이 생겼고, 점점 자랐다. 조금 더 농익을 때까지 애써 모른 척 두려 했는데 이렇게 삼출 되어버렸다. 어쩌면 계속 흐르고 있었는데, 모르고 있다가 알아차린 것이 그때였을 수도 있다.
"선생님 책 좋아하십니까?"
커피 향이 은근한 양장제본의 책을 건네면서 노란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가 말했다. 방광암으로 여러 번 입원하면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얼핏 살핀 문체가 할아버지의 얼굴처럼 둥글둥글 하고 여유롭다.
'여기' 에서 나는 의도치 않은 인과관계 의 바람에도 마구 흔들리는 잎새였다. '몬드리안..' 지극히 '현실'적인 거액의 무게를 구두뒤축에 즈려 밟으며 통로입구를 지나갈 때, 젊은 간호학생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로 막혔던 시야가 화폭처럼 좌르르 펼쳐졌다. 유난히 맑았던 지금의 하늘이 창을 통해 차가운 '추상'을 비춰주었지만, 태양항성에서 출발한 광자는 내 눈이라는 창을 투과하면서 폴록의 No.3가 되었다. 평범한 일상의 환경도 뜨거운 '추상' 같은 번민이 닿자마자 벌겋게 녹아 버렸다.
"차가운 막국수 드시고 오셨으면 이런 발효 차가 좋아요.."
지인과 충동적으로 들어간 유포리 산중턱의 찻집에서 젊은 아주머니가 이런저런 차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목련 차 향이 소박한 목소리와 부드럽게 섞이면서 고풍스런 한옥방을 채웠다. 창 밖 멀리 녹색 산에 걸린 불그스럼한 노을이 아직 내가 '저기'가 아닌 '여기'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저기'사람 같았던 이 여인도 카드를 내밀자 '사인해주세요' 라고 한다.
여기나, 저기나, 여기저기를 이어주는 통로나, 사람도 같고 액자도 같은데 그때그때 나만 달라지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