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의 탄생신화
시험을 못본 자녀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근무시간 중이었다. 전화가 딜딜딜 울린다. 아이가 건 전화를 외면해야 프로페셔널한 직원이겠지만, 이 시각에 전화하는 걸 보니 뭔가 일이 있나 싶어 일단 받고 본다.
'엄마, 시험 문제를 다 잘 푼 것 같은데 점수가 엉망이에요. 너무 못 봤어요'
이런 말을 들을 때 잠시 고민된다. 뭐라고 해야 하나.
좀 더 감성적인 말을 건네어야지 했지만, 내 천성을 거스르지 못하고
'네가 그 정도로 못 본 거면, 어려운 문제 아니었을까?'
'어떤 점이 어려웠어? 다음에 잘 보면 되지.'
이런 아주 건조한 말을 건네게 된다.ㅎ
이 문제는 이랬고 저랬고 두어 문제에 대해 왜 틀렸나 무척 억울했던 아이는 한참을 얘기하다 묻는다.
'엄마는 왜 야단을 안쳐?'
그 질문을 듣는 순간 혼란스러웠다. 1,2초 정적 후 아이에게 되물었다.
'시험 못 본 게 혼날 일이야?'
잠시 생각하던 아이는
'다른 엄마들은 다 야단친대'
이 답변에 아이가 혹시 내가 관심이 없어서 야단을 안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설명해 주었다.
'너는 시험을 준비했고, 시험문제도 몇 개 외울 정도로 시험을 열심히 봤어. 시험을 성실하게 대하지 않았다면 혼나야 맞지만, 네 할 일을 다해서 혼날 일이 아니야. 실력을 쌓으면 될 일이지.'
답답한 듯 아이는 한숨을 내쉰다. 실력을 언제 쌓이는 거냐고.
'앞으로 등짝 스매싱을 할까?'라고 묻자, 그러지 말란다. 그건 싫다고.
나도 어려서 수학 시험을 꽤 못 본 적이 있었다.
엄마가 등짝 스매싱을 날리실 때가 있었는데, 그건 계산을 덤벙거린 문제에 대해서였다. 전체적인 결과를 놓고 못 봤다고 야단을 치시거나, 실망을 드러내시진 않았다. 그저, 덤벙거린 문제에 대해서는 더 집중하라고 한마디 하셨지만, 나머지 어려운 문제들 틀린 건, 틀릴만했구나 정도의 반응이었다. 시험을 못 볼 때 엄마가 실망할 것이 두려웠지만, 혼날까 봐 두렵진 않았다. 엄마는 잘 보이는 대상이인 것이지, 시험을 심판하는 대상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래서 나는 이상했다. 시험을 못 본 건 실망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야단 칠일은 아니다. 그러나, 다들 Yes 할 때 혼자 No 한 내가 너무 이상향을 쫓아 아이를 키우는 것은 아닐까?
내가 세상에 나가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보다 남에게 관심이 없다는 점과 조금만 반대 의견을 내놓아도 '싹수없다'로 일축되는 것이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엄마가 너무 야단 안치고 들어줘서, 나는 세상에 나가서 당황해야 했다고 주장하곤 했다. 아무리 쓸데없는 소리를 해도 얼굴 붉히는 어른들이 안 계셨고, 내 생각에 대한 이견을 말씀해 주실 뿐이었다. 나에게 집안에서의 어른은 그런 존재였다. 들어주고, 알려주고. 그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사회에 나와서 힘들었던 점은 내가 무언가 요청하거나 질문했을 때, '누가 너한테 그런 걸 물어 보랬냐. 누가 너한테 그런 것들에 관심가지랬냐'는 선배들, 상사들의 언행이었다. 그리고, 결과주의. 아무도 과정은 묻지 않았다. '열심히'는 하든지 말든지, 결과는 '잘'. 이런 세상에 던져진 나는 이래도 저래도 감정 표현이 없고 수긍을 잘하는 친구들을 우습게 생각하면서도 부러웠다. 나도 사실은 그러고 싶은데 잘 되지 않았다. 내가 잘못된 것인지 고민하던 날들도 많았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그저, 너무 앞선 가정환경에서 자란 부작용이 있었을 뿐. 난 우리 엄마 덕분에 아이들을 닦달하지 않는 엄마로 성장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살면서 분명 결과를 따져 묻고, 본인들이 던진 질문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아야 할 것이다. 초반에는 나를 원망할지도 모른다. 엄마는 나에게 이런 걸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엄마가 괜찮다고 한 것들이 하나도 괜찮은 것이 아니었다고.
그러나 한편 고마울 것이다. 내가 부족해도 기죽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결과에 대해서 응징하기보다는 과정을 살펴봐 주던 엄마 덕분이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면서도 가끔씩 답답하다고, 너무 이상적인 말씀만 하셔서 반항을 하곤 했었는데, 끝내 내 정신세계의 토양은 엄마에게서 왔다. 그리고 엄마의 정신세계의 토양은 외할머니에게서 왔겠지. 이렇게 엄마는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나는 어떤 토양을 물려주고 어떤 식으로 아이들을 사고를 지배하는 엄마가 되려나.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너무 무섭다. 나같이 부족한 인간이 어쩌자고 아이를 둘이나 나아, 두 사람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 이 큰 사명을 알기에 완벽하지 못한 나지만, 아이들에게 적어도 나를 잘 설명해 아이들도 자신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어른으로 키워내고 싶다. 엄마가 된다는 일, 정말 무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