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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신지 Feb 25. 2019

이 나이 먹도록 제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모를 수밖에. 인생이 샐러드바라면, 우린 이제 막 입장한 사람들이니까


저는 스물두 살입니다. 아직도 제가 뭘 잘하고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러다 정말 계속 아무것도 못할까 봐 겁이 나요.


웹툰 <내 멋대로 고민 상담>을 묶어낸 김보통 작가의 신간 『살아, 눈부시게』를 읽던 중이었다. 나는 이 고민 상담의 오랜 팬이었다. 웹툰 연재 초창기, 정체를 숨기고 있던 작가를 찾아가 인터뷰를 청했을 만큼. 그는 모든 질문에 성실하게 답했고 부정확한 대답을 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말을 골랐다. 그의 상담을, 그리 길지 않은 답변들을 믿어도 좋겠다고 생각한 이유였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 그 고민과 답변들이 묶여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고 했을 때 반가웠다.


캠퍼스 매거진을 만들어온 지 3년 차. 직업병 탓인지 이런 고민들 앞에선 아,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지 덩달아 안절부절 말을 고르게 된다. 그런데 또 직업병 탓인지 ‘아직도’에 빨간펜으로 동그라미를 치고 돼지 꼬리 표시를 하고 싶더라. 스물두 살이면… 그땐 원래 모르는 건데? 모르는 게 맞는데? 비슷한 고민들은 이어졌다.


“벌써 스물한 살인데 아직 하고 싶은 일을 못 찾았아요. 어떡하죠?”

“저는 대학교 4학년이에요. 그런데 한심하게도 하고 싶은 게 하나도 없어요. 제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요.”


모를 수밖에. 아직 좋고 싫은 게 생길 만큼 무얼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일단 대학부터 가라고, 스무 살 되기까지 다른 건 생각말고 공부만 하라던 목소리들은, 스무 살이 된 바로 그 순간부터 무슨 청춘이 꿈도 없냐며 다그친다. (아니 그런 건 대학 가서 생각해보라면서요…?) 너무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당황스러울 정도다. 좋아하는 일을 찾기엔 우린 너무 경험이 제한된 입시의 세계에서만 살아오지 않았나. 


그런 뒤엔? 또다시 다양한 경험은 ‘일단 취업하고’란 말 뒤로 밀어둔 채, 취준의 세계를 살게 된다. 비슷한 스펙을 쌓으려 모두가 같은 어학 시험과 자격증만 쫓아다니는데, 그 나이 때의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뭐가 좋은지, 뭘 잘하는지. 그렇다면 이 고민에 대한 너구리 ‘노골이’(실은 김보통)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인생이라는 샐러드 바에서 이것저것 먹어보는 건 낭비가 아냐. 문 닫기 전에 본전 치려면 부지런히 먹어봐야지.

나는 이 문장에 너무 감동한 나머지 ‘김보통의 인생 샐러드 바 이론’이라 이름 붙였다. 과연 그렇다. 인생은 샐러드바 다. 이미 입장권 내고 들어온 뷔페다. 이것저것 먹어본 뒤에 스스로 찾아야 한다. 내가 접시에 더 떠오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아직 뭘 먹어보지 못했을 땐 당연히 판단이 잘 서지 않고, 남들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도 별 도움은 안 된다. 내가 직접 맛본 것이 아니므로. 내 입맛에 맞는지, 더 먹고 싶은지 알 수가 없다.



제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는 사실 매년 3월이면 학교에 새내기들이 들어오듯 반복되는 자연스러운 고민이다. 문제는 거기 따라붙는 성급한 핀잔일 뿐.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눈앞에 둔 사람한테 무얼 제일 좋아하느냐 묻고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답했더니 여태 좋아하는 것도 없냐고 타박하는 목소리들 말이다.


그러니 스물 몇 살의 우리가 ‘이 나이 먹도록 좋아하는 게 없다’며 의기소침해지는 건 그 말들에 지는 일이 아닐까? 스스로를 한심해하기엔 억울할 정도로 뭘 못 해봤으니까. ‘좋아하기’ 전에 ‘하기’가 먼저다. 일단은 뭔가를 해봐야 좋은지 아닌지 잘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 해보기 전에는? 아직 내가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일 뿐이다.


다시 사려 깊은 김보통 작가의 인생 샐러드 바 이론으로 돌아가자면— 샐러드 바 앞에서 이것저것 먹어보는 사람을 두고 시간 낭비한다고 할 사람은 없다. 그건 당연히 낭비하는 시간이 아니니까. 중요한 건 얼마나 빠르고 느리냐가 아니라,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는 일이다. 거기에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급한 마음에 남의 접시만 훔쳐보고 떠왔다가는 후회할지 모르고, 뭘 골라야 할지 몰라 남이 떠다주는 것만 먹다가는 진짜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은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고 일단 접시를 들고 한 바퀴 돌자는 얘기.


여기에 슬쩍 숟가락을 얹고 싶은 건 ‘맥주 샘플러 이론’. 

물론 내가 만들었다(…). 나로 말하자면 매달 맛있는 맥주를 마시기 위해 돈을 버는 맥덕인데, 그런 나도 수제 맥주의 세계에 입문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 수제 맥주를 접했을 땐 뭐가 맛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늘 그 집의 ‘샘플러’를 시켰다. 주로 라거와 페일에일, 아이피에이, 스타우트 등으로 구성된, 맛만 보라고 조그만 잔에 나란히 내어주는 미니 맥주다. 그 샘플러 덕분에 내가 라거보다 에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에일 중에서도 진짜 내 입맛에 맞는 몇몇 맥주의 이름들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시간과 돈과 간을 써본 뒤에 깨달은 사실. 남들이 맛있다고 하는 것도 내 입맛엔 너무 쓰거나 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게 있었고, 그리 평점이 높지 않은데도 내 입맛엔 맞는 것들도 있었다. 가보지 않은 나라를 여행할 수 없듯이, 먹어보지 않은 음식은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는 거였다.


그러니 내 입맛에 맞는 떡볶이를, 만두를, 파스타를 찾아 헤매는— 마침내 그런 걸 만났다 싶을 땐 ‘인생OO’이라 이름 붙이길 서슴지 않는 경험주의자들이여. 꿈에도 좀 기회를 주자. 하고 싶은 일에도 먹는 정성 정도는 쏟자. 그쯤은 헤매도 된다.


왜냐하면 우린 이미 뷔페에 입장해버렸고, 그렇다면 지금부터 ‘본전’을 생각할 만큼은 먹어보아야 하니까. 기왕이면 진짜 맛있는 음식을 찾아낸 즐거움도 느껴봐야 하니까. 이게 바로 김보통의 인생 샐러드바 이론과 김신지의 맥주 샘플러 이론이 만나 이룬 결론. 


일단은, 먹어보고 생각합시다.


Writer 김신지 

Illustrator 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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