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x3 빙고 안에 새해에 이루고 싶은 일들을 적어보아요
12월, 반성과 다짐의 달이 돌아왔다.
나 같은 프로 다짐러에게 연말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들뜨는 시즌이다. 지난 달력을 뜯어버리듯 망한 올해를 서둘러 버리고, 새로 산 다이어리처럼 마음에 드는 새해를 준비할 수 있으니까. 비장한 마음으로 몇몇 송년회를 거치며 파이팅을 다진다. 그래, 올해는 이 정도면 됐어. 무엇보다 내년이 있잖아! 하고. 아직 오지 않은 새해엔 어쩐지 뭐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 이미 반은 이룬 심정이 된다.
올해의 나는 ‘매일 일기 쓰기’를 해내지 못했지만, 부지런하고 총명하고 야무진 내년의 나는 분명 매일 일기를 쓸 것이다. 올해의 나는 ‘영어 회화 공부’라는 계획을 비록 1월 5일까지 실천했지만, 내년의 나는 유창한 영어를 뽐낼 게 분명하다. 내년의 나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될 예정이니 요가 3개월 반도 끊겠지. 요가를 하는 동안 심신이 두루 수련되어 마음엔 평화가 깃들 것이다. 그럼 짜증도 덜 내고 엄마한테 못된 말도 덜 하겠지. 착하고 기특한 내년의 나….
1년마다 삶을 새로고침 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덕분에 우리는 매년 12월이 돌아오면 31일까지 흥청망청 놀고, 1월 1일 00시부터 새 마음 새 뜻으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새해 카운트다운은 상냥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는 것만 같다.
자자,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다 없던 걸로 하고,
1월 1일부터
새로 시작하면 됩니다.
이런 이유로 연말을 몹시 애정하는 나는 지난해부터 친구와 특별한 연례 행사를 하나 더 마련했다. 바로 ‘새해 빙고’를 만드는 일이다. 스무 살에 만난 우리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계획쟁이들이지만, 서른을 넘기면서 점차 다짐뿐인 스스로에게 지쳐가기 시작했다. ‘다짐은 내가 할게, 실천은 누가 할래?’ 식의 안일한 정신으로는 매년 도돌이표 같은 반성을 하게 될 게 분명했다. 그리하여 서로의 계획을 응원하고 점검해줄 수 있는 빙고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새해 빙고의 규칙은 간단하다. 3×3, 5×5 등 원하는 대로 칸을 그린다. 그런 다음 새해에 내가 하고 싶은 일, 이루고 싶은 목표, 꼭 포함시키고 싶은 계획 같은 것을 칸칸이 채워 넣는다. 실제로 한 해를 살면서 가로, 세로, 대각선 어느 줄이든 먼저 채우는 쪽의 소원 들어주기! 먼저 “빙고!”를 외치지 못해도 상관없지만, 혼자보다 둘이 나은 이유는 알다시피 우리의 의지란 너무 작고 귀여워 강아지풀처럼 흔들리기 때문이다. 다행히 둘이 하면 서로의 빙고를 틈틈이 점검할 수 있다. 빙고는 잘 돼 가? 몇 개나 했어? 하고.
아무튼 지난해는 우리의 새해 빙고가 창시된 기념비적인 해였다. 12월의 마지막 날을 ‘빙고의 날’로 지정한 우리는 좋아하는 카페에서 만났다. 평소 준비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친구는 대형 서점 지류 코너에 미리 들러 좋아하는 컬러의 종이를 사 오는 정성까지 보여주었다.
우리는 카페의 좁은 테이블에 머리를 맞대고 앉아 삐뚤빼뚤 빙고판을 그리고, 한 달간 고민하며 수첩에 모아온 계획들을 채워넣었다. 내일이라도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과연 한 해가 끝나기 전에 할 수나 있을까 싶은 것까지 다양했는데, 그냥 그걸 적고 앉아 있는 시간이 좋았다. 해마다 12월이 오면 이런저런 계획들을 서로에게 떠들어 대던 스무살 무렵으로 돌아간 기분도 들었고.
그리하여 연말이 된 지금, 그 빙고는 어떻게 되었느냐면…
무려 한 줄도 지우지 못했다! 물론 이룬 목표와 실행한 계획들도 있지만 그래봤자 한 줄에 2개 정도라 좀처럼 5칸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5×5라니, 1년이 365일이니 25개의 계획쯤 너끈하게 해낼 거라 예상했던 작년 이맘때의 나를 규탄한다(사람이 매번 속으면서 또 이렇게 자기 자신을 믿고 그런다…).
그 과정에서 내 빙고의 맹점도 알게 되었는데, ‘매일 일기 쓰기’, ‘매일 자기 전 30분 독서’, ‘매일 조깅하기’처럼 다음 해의 12월 31일에 이르러서야 X 표시를 할 수 있는 목표는 적어선 안 되는 거였다. 그런 것은 1년을 두고봐야 하는 장기 프로젝트여서 나 같은 단기 의지를 지닌 사람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맥주 줄이기’, ‘문화생활 많이 하기’처럼 구체적이지 못한 계획도 곤란했다. 이런 실패를 발판 삼아, 새해엔 의지를 조금만 북돋우면 달성할 수 있는 소소한 목표들로 3×3 빙고 칸을 채워보려고 한다. 엄마 아빠랑 국내 여행 가기, 베프랑 제주도 다녀오기, 요가 3개월 다니기 등등.
연말은 역시 좋은 것이다. 매년 무언가를 다짐하고, 오지 않은 시간을 기대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으니까. 이루지 못한 것들에도 불구하고 빙고를 만드는 동안, 또 일 년 내내 책상 앞에 붙여두고 들여다보는 동안 일상이 좀 더 촘촘하게 흘렀다. 결국은 그런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일상을 그냥 흐르게
두지 않겠다는 마음,
지난해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기대,
누구의 뜻도 아닌 내 뜻대로
행복해지겠다는 의지 같은 것.
한 줄도 긋지 못햇지만, 그래도 몇 개의 X 표시가 있는 올해 빙고판을 바라보고 있으면 일 년을 헛살진 않았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내년에도 내 마음을 따라, 내 빙고에 집중하며 한 해를 보내야지.
혹시 여기까지 읽고서 나도 새해 빙고 도전? 생각하게 되었다면 빙고!
초심자에게는 3×3 빙고를 추천합니다.
내년에도 우리, 좋은 다짐들과 좋은 실천들을 해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