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어서 그만두면 그게 다 실패일까? 포기에도 용기가 필요한데.
지금 그만두면 도망치는 걸까요?
얼마 전 첫 취직을 한 후배가 물어왔다. 처음 합격 연락을 받았을 때 기뻐하며 찾아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저 이제 출근해요! 하며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아 우리는 새 직장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길 하며 커피를 마셨더랬다. 그런데 몇 달 뒤, 오래 생각해온 듯한 말투로 이렇게 물어온 것이다. 지금 그만두면 도망치는 걸까요?
말하면 어렵지 않게 해결될 일인데 신입이라 괜한 속을 썩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다. 그러고 역시… 그만두는 게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주말에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내고, 신입에겐 허드렛일만 시킨다면 그런 부분은 안타깝게도 바뀔 가능성이 적으니까.
회사 사람들은 다 좋은데 그냥 자기가 문제인가 싶기도 하고, 이런 적이 처음이라 혼란스럽다고, 무엇보다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 걱정된다고 후배는 말했다. “포기가 아니지.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이야. 왜 멀쩡한 너를 포기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속상해서 그렇게 답했다.
그러니까, 우린 이게 문제다. 참는 게 미덕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말고 노력하라는 말을 하도 듣고 자라온 통에, 무언가를 그만두는 건 다 실패로 여긴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게 되기까지의 용기는 높이 사고, 그 일을 그만두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단 사실은 쉽게 잊어버린다.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포기라 말한다. 때문에 이런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자신을 탓하게 되고 만다. 남들은 잘만 다니는데 내가 나약해 빠진 거 같고, 상황이나 시스템 자체의 문제보다는 내가 이상한 게 아닌가를 먼저 검열하게 되고….
고민 끝에 결국 그만두겠다고 말하면?
예외없이 ‘요즘 애들’ 운운하는 말이 호출되겠지. 아무튼 요즘 애들은 끈기가 없다든지(대체 무엇을 위한 끈기를 말하는 걸까? 옛날부터 이렇게 일해왔으니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끈기라 부르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사람들만이 끈기를 말하던데), 그런 정신으로 앞으로 뭘 하겠냐라든지(싫은 걸 버텨낼 힘으로 좋은 걸 하면 더 잘하겠죠^_^) 어려서 책임감이 없다든지(슬프게도 책임감과 성실함은 이미 차고 넘치는데, 하필 남에게는 관대해도 자신에게는 관대하지 못한 사람들만이 저런 고민을 한다. 그만둬도 될까요? 그만두면 도망치는 걸까요? 하고)….
그런데,
도망이 과연 나쁜 걸까?
애초에 왜 도망을 나쁘다고만 말하는 걸까?
스트레스에 관련된 글을 읽다가, 스트레스 받을 때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진화론적으로 매우 훌륭하게 다듬어진 결과라는 걸 보고 무릎을 쳤던 적 있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우리 몸은 ‘위험하다’고 인지하게 되고, 그에 따라 호르몬을 분비해 스트레스에 ‘맞서 싸우거나 도망칠(Fight or Flight)’ 수 있는 몸 상태를 만든단다.
즉 심장이 더 빠르게 뛰고, 동공이 확대되고, 숨이 가빠지고, 뇌와 근육에 많은 양의 혈액을 공급하는데, 이게 다 우리가 더 빨리 반응하고, 더 잘 보고, 더 쉽게 호흡하도록 몸을 준비시키는 기특한 현상이란 것.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나는, 스트레스 반응이 실은 ‘도망을 위한 준비’라는 사실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그랬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먼 옛날 숲속에서 갑자기 맹수가 뛰쳐나왔을 때, 이렇게 준비된 몸으로 ‘맞서 싸운’ 쪽과 ‘도망친’ 쪽이 있다면 당연히 후자가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도망자의 후손인 셈이다. 유레카!
‘스트레스?=ㅇㅇ도망’ 공식을 받아들인 후로 도망은 역시 소중한 것이구나 여기게 되었다. 도망이 왜 있는데? 위험한 걸 피하라고 있는 건데. 나를 힘들게 만드는 일, 힘들게 하는 사람으로부터는 도망치는 게 맞구나.
원래도 없었지만 나는 내가, 또 우리가 끈기가 좀 없었으면 좋겠다. 부당하게 힘든 것을 참고 견디는 것,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면서까지 스스로를 소진하는 것을 끈기라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신 어디 갖다 붙여도 괜찮을 만큼 접착성이 약한 존재들이면 좋겠다.
언젠가 다섯 살배기 조카가 공룡 스티커를 가지고 노는 것을 본 적 있다. 정글 그림이 그려진 빳빳한 판 위에 여러 공룡들의 실루엣이 점선으로 그려져 있어서, 그 모양에 맞는 공룡 스티커를 찾아 붙이면 되는 놀이였다. 그림판도 매끄럽고 스티커 뒷면도 매끄러워서 실수를 해도 몇 번이든 다시 제자리를 찾아 붙이면 되는, 아주 너그러운 스티커였다. 요즘엔 이런 걸 갖고 노는구나 신기해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런 것을 가지고 놀았더라면, 실수와 함께 괜찮다는 것도 함께 배웠더라면ㅡ 줄 하나 잘못 그었다고 노트를 통째로 버리고 싶어지던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을 텐데. 나는 왜 삐뚤어진 그 한 줄이 내 노트를 다 망쳤다고 생각했을까? 그 부분이 눈에 띌 때마다 마음이야 쓰이겠지만 그게 결코 노트 한 권을 망쳐버린 것은 아닌데.
살면서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먼저 한 선택을 번복한다고 해서 내 삶이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다. 스스로가 자리를 잘못 찾은 스티커같이 여겨진다면, 떼어서 다른 데 다시 붙이면 되는 일이다.
그것을 실패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다음 기회가 있다는 걸 잊지 않는다면.
“지석아, 거기 람베오사우르스 자리 아닌 거 같은데?”
이마도 볼록, 볼도 볼록한 짱구 같은 조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호숫가 옆에서 비슷한 그림을 발견하곤 스티커를 쫙 뜯어내어 거기 갖다 붙였다“여기!!” 씩씩하게 외치며. 람베오사우루스는 뜯겨진 자국 없이 제자리에 찰싹 붙었다. 아주 산뜻하게.
우리에겐 그렇게 나를 위해 비어진 딱 맞는 자리 같은 건 없을지라도, 힘들 때면 생각해야지.
‘붙였다 뗐다 진짜 공룡 스티커 놀이’를.
끈기 없이,
좌절도 없이,
내 자리를 찾아다녀야지.
IIllust 강한 Words 김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