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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연 Dec 05. 2019

서른이 되고 나서야 칭찬을 받았다.

12월 첫째주의 마크로비오틱 비건 밥상

 소설이 지나고 대설이 가까워지니 부쩍 날이 추워졌다. 화요일 오전에는 잠시 눈발이 흩날렸다. 작년 이맘때에도 눈이 왔다. 그날 아빠는 홍콩에 사는 손녀(내 조카)에게 보여줄 눈사진을 찍겠다고 옥상에 올라갔다가 미끄러졌고, 나는 그 사이 집에서 스콘을 구웠다. 그저 1년 전일 뿐인데 무척 옛날 일로 느껴진다. 지난 1년간 무척 많은 일이 있었기에 나에게 1년 전은 아득한 옛날 일 같이 느껴진다.


 팝업식당의 마지막 정규영업을 마치고 며칠 요가에 집중하며 쉬었다. 평소 내가 힘들지 않을 정도의 손님만을 받고, 마지막 영업에도 이 방침을 유지할 계획이었지만, 막상 자주 찾아주시던 손님들의 연락을 받으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평소보다는 다소 무리해서 예약을 받았더니 이내 피로가 쌓였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덕분에 단골손님 중 아쉽게 발걸음을 돌리는 분은 계시지 않았고 내 마음도 편했다. 올해 하반기의 내 삶의 키워드 중 하나는 ‘치열하게 살지 않는 것’인데, ‘치열하게 사는 것’과  ’편하게 사는 것’은 다르다. 이번 마지막 영업주간에는 체력적으로 다소 무리한 감도 없지 않지만 치열하게 살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잠시 소진했던 체력도 며칠 요가를 통해 회복했다. 지쳤다고 이불속으로 들어가있기 보다는 몸을 움직이며 구석구석에 뭉친 근육과 혈액을 풀어주는 편이 더 빠르고 양질의 피로회복으로 이어진다.


 며칠 쉬었더니 또 손이 근질근질하다. 영업 후 남은 식재료도 걱정이다. 다시 작업실로 출근해 밥상을 차려 본다. 게다가 얼마전 담근 깍두기도 걱정된다. 젓갈 등 동물성 재료가 없으면 발효가 안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젓갈과 설탕 한톨 없이 만들었지만 내 김치는 어찌 잘 익었던지 이제 슬슬 신 맛이 돌 정도. 

 영업후 남은 우엉으로는 급히 우엉당근조림을 만들고, 깍두기를 곁들였다. 애매하게 남은 연근으로는 대설을 앞둔 기념으로 현미 떡국을. 구미에서 올라온 귀한 손님이 건네주고 간 배추와 남은 유부로는 배추 유부조림을 만들어 한 상을 차려본다. 현미 떡국에는 김을 곁들였으면 좋았을텐데, 아쉽게도 김이 없다. 조만간 김을 사 냉장실에 보관해 두고 싶은데, 요리하는 사람의 냉장고이다 보니 어느덧 냉장고가 가득 찼다... 냉장고를 두세개씩 사둔다는 요리연구가를 흉보곤 했는데, 이제서야 그 마음이 이해가 간다. 가루, 곡식 등의 재료를 신선하게 보관하기 위해 찬장이 아닌 냉장고에 보관하니 금방 냉장고가 가득 찬다. 한편, 이런 딸과 함께 냉장고를 써온 엄마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든다. 집과 팝업식당에서 집을 가져오고 보니 어느덧 우리집 찬장은 요리를 취미로 즐기는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한편, 양질의 유부를 사용해 최소한의 기름으로 만드는 서양풍 간단 조림요리에 빠져있는데 이번에는 배추로 만들었다. 일반 조림 요리보다 조리 시간은 짧지만 재료의 감칠맛은 최대한 이끌어 내며 식사용 반찬으로도, 손님 접대용으로 손색없다. 지갑 사정도 챙겨주니 일석 삼조 쯤 되는 듯하다. 

 새 작업실에서 첫 수업을 앞두고 이제서야 작업실의 모양새가 갖춰져 슬슬 사람들을 불러오고 있다. 나의 작업실을 방문한 첫 손님은 프로젝트 하다에서 일요식당을 했던 단비님. 그리고 두번째 손님으로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가 찾아주었다. 새 오븐으로 감을 잡을 겸 감귤 현미 마들렌을 구워두어, 마들렌과 함께 티타임을 즐겼다. 평소 강남구에서 벗어날 일이 없는 할머니도 오랜만에 마포구에 방문해 무척 들떠있었다. 

작업실을 떠나시며 할머니, 할아버지가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건네셨다. 다소 어린 손주들, 직장생활만 해온 손주만이 있었기에, 자신의 일을 시작하는 손주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처음. 어떤 말을 건넬지 고민 하셨는지 ‘축 발전’이라고 꾹꾹 눌러 적어주셨다. 이 단어가 마음을 콕 찔렀다. ‘발전’이라는 단어에는 과거보다 지금의 상황이 나으며 그 상황을 스스로 이루어 내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축 발전’ 이라는 단어에는 축하의 의미와 그동안의 노고에 대한 칭찬의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고 느꼈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왔지만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오랜만에 칭찬을 들은 듯만해 가슴이 벅차다. 

 20대 신입사원 시절. 주변 어른들은 나에게 칭찬에 박했다. 매출과 같은, 정량적인 목표치가 정해져있지 않은 일을 했기에, 나의 성과를 평가할 기준이 애매하기도 했다. 치기에, 상사에게 때론 칭찬도 해달라는 말도 안되는 어리광을 피우기도 했고, 상사 역시 ‘나는 칭찬에 목마른 사람에게는 칭찬하지 않는다’ 는 대답과 함께 나의 어리광을 말살했다. 그렇게 칭찬을 바랐던 상대에게 칭찬을 받지 못한채로 신입사원 시절이 지나가고, 이후 칭찬을 받기보다는 칭찬을 해주어야하는 입장이 되었다. 제대로 칭찬을 받지 못했으니 나는 칭찬을 해줄줄 모르는 상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회사를 나온 뒤에는 혼자 일을 하며 지내다 보니 칭찬을 해줄 상대도, 받을 상대도 없어졌다. 그렇게 칭찬과 멀어진 지금에서야 제대로 받는 칭찬은 내 가슴을 울렸다.

 더운 여름날 일본에서 한국으로 날아와 나의 팝업식당도 찾아주었던 모교, 리마의 친구가 이번에는 추운 겨울날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며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친구 모두가 좋아하는 막걸리집을 예약해, 일본에서는 맛보지 못했을 아스파탐이 첨가되지 않은 생 막걸리를 나누어 마셨다. 모처럼 한국까지 왔으니 옥돔구이라도 주문해줄까 했지만, 친구나 나나 마크로비오틱을 실천하기에 채소 반찬 몇가지로도 충분하다. 무리해서 이것저것 주문해 음식물쓰레기를 만드는 것은 마크로비오틱 답지 못하다. 함께 모교의 교육을 받아, 서로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마음 편한 모교의 친구가 외국에서 찾아와 내가 좋아하는 곳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서른을 넘었지만 가족에게 칭찬을 받으며 산다. 나의 2019년 12월은 마음만큼은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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