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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연 Dec 11. 2019

얼마 가지 않을 고민 없는 일상은 일단 즐기고 보자

12월 첫째주의 마크로비오틱 비건 밥상

 11월이 훌쩍 지나갔다. 식당영업을 마무리 짓고, 쿠킹클래스도 준비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눈길을 줄 여유가 없었다. 나만의 작업공간이 생겼다고 하니, 직장에서 조직생활을 하며,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친구들은 이런 나의 공간에 대한 관심을 내비쳤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친한 친구들마저 부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핑계라면 평생 친구들이 놀러올 기회도 없어질테니 부랴부랴 12월 중에 친구들에게 작업실을 공개하는 일정을 잡고 있다. 

 나의 주종목은 밥과 국, 반찬을 곁들인 집밥이지만, 바쁜 친구들이 주말에 시간을 내어 찾아줄 예정이며, 연말 모임도 많은 시기이다 보니 평소 내가 먹는 것을 내어주기 보다는 약간의 끼를 부려야 친구들도 젓가락만 빨다 가지는 않다. 레시피를 만들어 볼 겸, 혼자 작업실에서 먹는 식사이지만, 평소와 다른 메뉴를 만들어 본다.

 흑임자 소금과 귤피로 향을 낸 딸기 퀴노아 쑥갓 샐러드

 피스타치오를 올린 생강향 당근 라페

 딜로 향을 낸 배추와 무말랭이 현미 주먹밥

 스파클링 와인이나 화이트 와인에 어울릴 법한 메뉴들로 구성할 생각인데, 술자리라 해도 밥이 빠지면 한밤중에 뱃속이 심심해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기 십상인 사람인지라, 밥도 끼웠다. 그래도 딜 향이 은은하니 와인에 안어울리지는 않을거라 우겨본다. 식감과 향을 위해 다음에는 딜과 무말랭이를 조금 더 넣어보아야지…

 가벼운 메뉴들로 식사를 마치고는 마지막으로 작업실을 꼼꼼히 정리한다. 금요일부터 이 공간에서 쿠킹클래스를 시작한다. 넓지 않은 공간인 만큼 구석구석 생활감이 느껴질만한 요소를 지워보려한다.


 금요일, 토요일의 쿠킹클래스는 초심자를 대상으로 하는 ‘겨울의 마크로비오틱’ 4회 과정의 첫수업. 내가 직접 개최하는 쿠킹클래스는 반년만이다. 내가 팝업식당을 열었던 공간, 프로젝트하다가 식당을 하기에 최적화된 공간이었던 만큼, 반대로 쿠킹클래스에 적합한 공간은 아니었다. 적어도 오신 분들이 칼질 한번은 하다 가셨으면 했는데, 조리대, 개수대 사정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고민 끝에 쿠킹클래스를 위한 공간을 준비해왔다.

 다행히 오신 분들 모두 칼질을 포함해 조금이나마 조리를 경험하고 가실 수 있었고, 실습한 메뉴도 다행히 호평이었다. 첫수업에서는 가장 중요한 현미밥 짓기와 채수 내기를 꼼꼼하게 알려드리는 만큼 반찬은 비교적 간단한 메뉴를 만드는데 밥, 국, 반찬 모두 호평이었다. 식당영업을 하던 시절보다 밥을 많이 지은 편이라, 공기에 한가득 밥을 담아가셨는데, 쌀한톨 남김없이 다들 밥공기를 비워 내시고, 무엇 하나 빠질 것 없이, 그릇을 비워 내셨다. 이틀간 16인분의 요리를 했는데, 음식물쓰레기는 한줌이 될까말까 할 정도였다. 최소한의 기름으로 조리하기에, 설거지를 할 때에도 소량의 세제, 물로도 충분하다. 식사 중 남은 음식도 없고, 남은 소스류 역시 챙겨드렸다. 늘 이런 조리를 해온 나에게는 익숙한 일이지만, 마크로비오틱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이 모인 첫수업이었던 만큼 많은 분들이 놀라워 하시고, 삶을 넘어 라이프스타일의 하나인 마크로비오틱을 경험하고 가셨다. 주로 요리를 가르쳐 드리지만, 마크로비오틱은 삶이라는 것을 가장 알려드리고 싶어하는 사람이기에 내심 안심했다. 

(쿠킹클래스 후기는 이곳에)

 금요일 저녁. 수업을 마치고는 한 시간 가량 요가 수련을 했다. 지난달까지 금요일에는 매주 식당영업 또는 쿠킹클래스를 했으니 금요일 저녁에 요가를 하고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무척 오랜만이다. 불금을 마다하고 요가원에 모인 동지들과 호흡을 나누다가 문득, 무척 감사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진 능력을 사용해, 하고 싶던 일을, 내 삶에 무리가 가지 않을 만큼만 하며 산다. 눈 앞에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으니,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실감할 수 있다. 일을 마친 뒤에는 하루를 돌아볼 시간이 주어 진다. 지난 7년의 직장인 시절에는 더 많고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어 있었지만, 이 날과 같은 감상을 가진 적은 없다. 오히려 늘 고민스러웠다.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지, 나의 일은 회사 밖의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고 있는 일인지.

 이틀간의 수업을 마치고, 일요일에는 오랜만에 작업실에 가지 않고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동안 집에서 요리를 하지 않았으니 어김없이 집에는 내가 먹을 음식은 없다. 냉장고를 뒤적여 보니 채소는 눈에 보이니 있는 재료로 잡채를 만들기로. 손이 많이 가는 음식으로 손꼽히는 잡채를, 이제는 즉석에서 해낸다. 사실 잡채는 생각보다 냉장고 털이에도 좋고, 간단하다. 마크로비오틱 조리에 익숙하다 보니 최소한의 기름으로 만들며 설탕은 커녕 조청 같은 천연감미료 조차 사용하지 않으니, 깔끔하고 담백하게 만들 수 있어 저녁에 먹어도 소화에 부담이 되지 않는다.

 작업실에는 수업 후 남은 재료가 넘쳐나고, 집에는 내가 먹을 반찬이 없으니 작업실에서 반찬을 만들어 집으로 가져오기로 한다. 앞으로는 이렇게 지내는 것이 익숙해 질 듯 하다. 수업에서 사용하고 남은 연근으로는 연근톳조림을 만들고, 지난주 사두었던 유부는 무말랭이와 함께 조렸다. 무말랭이조림은 기름 사용량을 줄이면서 유부의 식감은 살릴 수 있게끔 레시피를 개선했다. 뿌리채소가 많으니 뿌리채소 된장도. 국에도 정성을 쏟기에는 반찬이 많으니 국은 가장 간단하게 알배추 된장국. 정말 간단한데, 채수만 제대로 내면 채수로 만든 국에서 조개국물 맛이 나는 신기한 메뉴인지라, 올해 초 진행했던 클래스에서도 다들 놀라워 하셨던 기억이 난다.

 차려놓고 보니 마크로비오틱 교과서에 나올 법한 기본 메뉴가 가득한 한 상이다. 게다가 먹고 나면 체온이 오르고 혈색이 좋아질 듯한 조합. 특히 뿌리채소의 달콤한 맛과이 일품인 뿌리채소 된장은 체온이 낮은 사람이 끼니마다 챙겨먹으면 체질 개선에 도움이 되는 약과도 같은 메뉴인데 약이라 부르기에는 민망하게 맛있다. 양배추, 배추 등을 가볍게 쪄내 쌈을 싸먹어도 좋다.


 소박한 한상이지만 계절과 내 몸에 맞게 차려 한끼 식사를 마치니 몸도 마음도 편안하다. 식사를 마치고 주방 정리를 마무리 짓고는 어둑한 작업실에서 증기가 퐁퐁 올라오도록 가습기를 틀어놓고는 약간의 레시피 정리를 하다가 늦지 않은 시간에 작업실을 떠났다. 전철안에서는 최근 좋아하게 된 작가의 에세이를 펴 놓고는 졸았다가, 다시 읽었다가...내 마음대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것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해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다. 식당손님이 선물해 주고 간 샤워 젤이 바닥을 보여간다. 어떻게 알았는지 내 취향을 저격하는 향이었다. 샤워를 마치고는 아직 샤워젤 향이 남은 몸에 로션을 바르고 스킨케어를 하다보니 문득 별거 아닌 나의 일상이 별거 아니라 만족스럽다. 크고 작은 고민을 달고 살고, 내 눈 앞에 펼쳐진 별거 아닌 것들이 주는 감성을 느끼며 살아가기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제대로 단풍구경을 하지도 못했는데, 문득 출근길 재촉하는 내 발걸음에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단풍은 커녕 길거리에는 바싹 마른 낙엽이 굴러다니곤 했다. 뭐가 그리 고민이라고 제대로 고개를 들어 은행나무 한 번 쳐다볼 일이 없었던 걸까. 나에게도 다시 고민이 찾아오겠지. 하지만 나의 능력을 갖고 내가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을 시작한 지금 만큼은 큰 고민이 없다. 큰 고민 없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차려 먹고, 전철안에서 꾸벅꾸벅 졸아가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요즘이다. 그 감사함을 실감할 수 있을 여유가 있다는 사실 또한 감사해야 할 일이다. 이 고민 없고 감사한 생활이 얼마나 유지될지는 모르지만, 뭐 어떤가. 인생에 얼마 주어지지 않을 행복인 듯 하니, 지금은 이 행복한 상황을 만끽해보련다.


쿠킹클래스 관련 공지는 블로그에

마크로비오틱이란? 차근차근 알아가는 마크로비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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