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엔 사람
오늘은 입추(立秋). 이름이야 가을의 시작이라지만 그 옛날에도 입추까진 얼음이 임금님 진상품이었다고 하니 오늘까지 더위가 가시지 않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하지만 그때도 이렇게 습했을까? 밖에 1분만 서 있어도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고 숨이 턱턱 막혀 견디기 힘들다. 요며칠은 정말이지 아가미가 필요한 날씨였다. 차라리 이곳이 수족관 안이라면 보는 즐거움이라도 있었겠지만, 나는 바람 하나 통하지 않는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취재를 이어갔다.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
답은 무조건 현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도 1년 전 사고 피해자와 목격자를 찾으려 무턱대고 차로 2시간 거리를 날아갔다. 그렇지만 현장에서도 답보상태였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지나가는 사람도, 인터뷰에 응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이러다 진짜 여기서 밤 새는 게 아닐까. 결국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실례를 무릅쓰고 차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처음엔 경계하셨지만 얘기를 나눌수록 만나뵙고 싶은 사례자였다. 하지만 긴긴 통화 끝에 답변은 거절이었다. 취지는 이해하지만 부담스럽다는 게 이유였다. 이해했다.
후우. 시간은 없고 다시 인터뷰이를 찾아야 한다. 숨을 크게 들이켜고 주위를 둘러봤다. 시야에 단 한 명도, 정말 아무도 없을 때의 절망이란…. 그때 마침 진동이 울렸다. 방금 그 분이었다.
미안해요. 많이 덥죠? 내려갈게요.
이렇게 감사할 수가. 내 마지막 말이 그 분의 마음을 건드린 모양이다. "불쑥 전화했는데 당연히 이해합니다. 괜찮아요. 근데 오늘 폭염 경보인 거 아시죠? 여기 너무 더워서 숨이 안 쉬어져요. 진짜로요." 역시 인류애는 보편가치다. 목소리에서도 더위가 느껴졌다나. 앞머리가 아니라 미역줄기를 얼굴에 달고 있던 나를 보더니 더 미안해하셨다. 무턱대고 만나자고 한 내가 100배는 더 미안한 일이었는데…. 남의 더위를 그냥 지나치지 못할 만큼 한국 사람은 착하다.
인터뷰를 마치고 서둘러 지하주차장을 벗어났다. 밖은 여전히 땀을 식히기조차 힘든 땡볕이다. 그래도 마음 속 더위는 한 풀 꺾인 후였다. 이게 바로 가을의 문턱일까. 마음이 따뜻한 시민 덕분에 올해는 조금 앞선 입추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