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니라 꺾였는데도 그냥 하는 마음
위클리 기획팀을 떠나 다시 데일리 사건팀을 돌아온지도 5개월째다.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이 훨씬 밝아졌단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인상을 찌푸리는 일이 거의 없다. 머리를 쥐어뜯는 발제 고민 없이도 그냥 저냥 먹고 산다. 매일 사고는 터지고, 내가 아니어도 큐시트를 막아줄 기자는 넘쳐난다. 아직은 배울 게 한참 많은 주니어 기자지만, 팀내에선 어중간한 연차(라인 일진)가 되어버려서 마냥 몸으로 떼우는 기사는 이제 후배들의 몫이 되었고, 후배 기사를 조금이라도 도와주려고 시간을 쪼개 경찰서 마와리를 돌아도 만나주는 경찰은 손에 꼽힌다. 이제 앓는 소리가 더 이상 먹히지 않는 출입처 고인물이 되어버린 셈. 나름 기획을 하거나 모찌를 가져와서 후배들과 나눠먹는 기사를 쓰고 싶은데, 결과적으로는 1인분도 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현실. 최근 몇 개월간 이 반복되는 굴레에 지쳤고, 잠시 이 고민의 끈을 놔버렸다.
며칠 전 동기와의 대화는 이런 나의 모습이 모조리 발가벗겨진 것 같았다. 입사 5년차, 이제는 주어진 대로 열심히 하기보다는 내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갈지 스스로 계획을 짜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그래, 남들 눈에도 나의 나태함이 보였을거야. 누군가 머리를 세게 콱! 치고 간 느낌이랄까. 순간, 너무 부끄러웠다.
너는 주어진 것과 맡은 일에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애라서 특히 걱정돼.
이것저것 경험을 많이 해보는 것도 중요하고 좋은 일이지만
아무 계획 없이, 생각도 없이 지나가면 그냥 꿈꾸고 난 것처럼
사라져서 의미를 깨닫지 못하게 될걸.
최종적으로는 네가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는지 스스로 생각해보고
구체적이진 않더라도 이젠 대강의 방향을 잡고 있어야 해.
그래야 완전 엉뚱한 길로 새지 않게 되지.
이런 것도 해보고, 저런 것도 해봤으니 다음엔 뭘 할 수 있겠다.
뭘 해보고 싶다 이런 걸 생각해놔야 인사 면담 때 할 말도 생기고
너의 미래가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해지는 거야.
그게 없으면 아, 얘가 하고 싶은 게 없나 보구나 생각하게 될걸.
그러면 자꾸 인사가 네 뜻대로 안되고, 점점 주어진 것만 하게 되고
너는 목표가 뭔지 모르는 악순환만 반복돼.
동기의 조언을 듣자마자 생각난 건 '중꺾마'가 아니라 '꺾그마'. 중요한 건 결코 꺾이지 않는 마음이 한때 대세였는지 몰라도 지금의 내게는 와닿지 않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꺾였는데도 그냥 하는 마음이지. 한꺼풀 꺾인 열정에도 그냥 나만의 방향성을 가지고 묵묵히 내 길을 가는 것, 지금 내겐 그게 더 중요했다. 입사 5년차의 슬럼프라고 아무리 열심히 포장해도 실상 내 모습은 그냥 배부른 돼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취업이 절박했던 언시생 시절이나 앞뒤 잴 것 없이 세상 치열했던 수습기자 시절, 눈만 뜨면 발제를 고민하던 지난해 기획팀 때 근무 환경을 생각해보면 이 모든 건 배부른 고민이니까. 봄휴가를 마치면 다시 굶주린 늑대로 돌아가야겠다. 미래를 설계해야겠다. 다시 고민하는 기자가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