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객은 기자
두어 달에 한 번꼴로는 수원지법으로 출근한다. 그럴 때면 서초동으로 출근할 때보다 더 부산스럽게 아침을 맞는다. 오전 내내 혼자 재판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SOS를 칠 선배나 안면 있는 타사 기자도 없다. 이전 기사를 참고해서 재판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는지 확인하고, 밤사이 노트북과 폰이 완충 상태였는지 다시금 체크한다. 재판 내용을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할 거란 불길한 예감보다, 재판 도중 두 전자기기 중 하나라도 배터리 수명이 다하는 걸 상상할 때가 더 끔찍하고 두렵다.
벌어지지도 않은 쓸데없는 걱정은 뒤로 하고, 출근길을 재촉했다. 역대급 한파에다 차가 막힐 것을 감안해 좀더 일찍 택시를 불렀다. 전날의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K-직장인의 아침, 조용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금세 운전석에서 질문이 날아왔다.
서울도 아니고 수원까지 법원을 가시네요?
조수석 헤드 쪽에 책 보이죠? 저거 내가 쓴 책이에요.
가시는 길 아직 꽤 남았는데, 읽어보면 어때요?
잘 수 없겠군. 그러고보니 정말 조수석 헤드 앞에 책이 꽂혀있었다. 10년 전부터 승객을 나르며 겪은 여러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겨내고 나름의 직업의식을 발휘해 수원지법으로 향하는 1시간 반 동안 열과 성을 다해 인터뷰했다. (기사님은 내게 무한한 질문을 원하셨고, 그 결과 몇 년 전 우리 회사에서도 인터뷰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기사님의 다음 소망은 승객들의 방명록을 엮어 책을 펴내는 것이다. 실제로 방명록에는 시험에 꼭 통과하고 싶다는 다짐을 적어둔 의대생부터 연말 귀가길을 함께한 승객, TV에서 기사님을 봤다는 팬까지 다양한 메시지로 가득했다. 이 얼마나 특별한 출근길인가. 읽기만 해도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렇게 모아둔 방명록이 벌써 10권 째란다. 펜을 건네주시기에 악필이지만, 나도 용기를 냈다. 하차 전 나의 메시지도 한 귀퉁이에 자리했다.
택시를 타신 모든 분들의 행복을 빕니다.
내일만이 아니라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앞으로도 쭉 좋은 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택시를 탈 행운의 승객들을 위해 썼지만, 결국은 내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앞으로도 쭉 좋은 길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