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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스 Sep 13. 2021

들어주는 어른

말해주는 아이

정확히 일요일 밤 10시, 침대 위에서 한없이 뒹굴고 있을 때였다. "학교에서 일어난 여러차례의 몰카 사건과 학교의 비정상적인 대처에 대해서 알리고 싶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적어낸 제보글. 학교 측이 평판과 명예를 이유로 사건을 축소시키고 입막음을 하려 한다는 게 요지였다.



2년전의 안일한 대처가 비슷한 범죄를 또 일어나도록 했다고 생각합니다.
제보를 할지 말지 많이 고민하고 이 메세지를 적는 동안에도 손이 떨립니다.

장문의 글을 읽고 나는 이 제보를 하는 사람이 피해 학생인지, 피해 학생의 친구인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 사실과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니까. 제보자는 피해 사실을 알고 있는 재학생이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제보 내용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영상자료나 녹취는 없었다. 기자로서 단박에 알았다. 이 내용이 사실이더라도 기사화하기는 쉽지 않겠구나. 하지만 학생이 얼마나 고민하다 나에게까지 연락했을까 생각하면 거기서 멈출 수 없었다. 내 질문이 막바지로 향할 무렵, 저쪽에서 들려온 말은 "조금 더 들어주실 수 있나요?"


얘기 끝에 결국 피해 학생과 직접 연락을 닿는 데는 실패했다. 수시 원서 접수 기간 중인 고3인지라 집중해야할 시기이고 정서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이란다. 대한민국에서 고3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바가 아니니 충분히 이해했다. 그리고 서둘러 말을 건넸다. 그래도 고맙다고, 언제든지 말해달라고.



이 밤에 긴 얘기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혹시 다른 곳에서 비슷한 일로 상처받고
도움을 요청하는 친구가 있다면 도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들어주는 어른이 있어서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위로가 되었단 말에 멈칫했다. 1시간에 가까이 대화를 나눴지만, 나는 그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결책이 뭐야, 괜한 위로의 단어도 섣불리 보탤 수 없어서 그냥 듣기만 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도움이 되었다니 착잡했다. 열아홉 아이들의 말에 귀기울여줄 학교가, 선생님이, 부모님이, 주위 어른이 없었단 말을 이렇게 돌려가며 말하는 의젓한 학생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학생들 곁에서 충분히 들어주는 어른들도 많이 있어요. 오늘은 꿈도 꾸지 말고 편안한 밤 되세요. 응원합니다."


헌데, 이후 돌아온 더 어른스러운 대답. 또 한번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네, 기자님도 저보다도 좋은 밤 보내세요.


오늘은 나의 좋은 밤을 기꺼이 양보하고 싶었다. 내몫까지 이 아이에게 좋은 밤을 선물해주기를. 용기내어 말해주는 아이들 곁에 항상 들어주는 어른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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