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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Apr 09. 2023

평생 후회할 거라 생각했는데

당신도 점점 흐려지네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지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서른 번의 봄. 이 계절을 보내면서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실수를 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학기 초의 공기가 너무 어색했고, 모든 걸 빨리 잘 해내야 한다는 마음에 에너지를 쏟아붓고 지쳐 나가떨어지기도 했다. 남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내 부족한 모습에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다가 혼자 폭발해버리기도 했다.


남은 계절은 폐허를 들여다보고, 잔해 앞에서 무력해지고, 겨우 수습하며 보냈다. 대부분의 것에 서툴렀고 자주 후회했다. 하지만, 돌아간다 한들 딱히 대단한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닌 데다 그 생생한 고통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매 순간의 최선이었다고 믿고 지나간 순간을 보내주는 수 밖에 없었다.


한 가지만 되돌릴 수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한 번의 기회가 있다면, 당신을 조금씩 잃어버리던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내 인생 가장 따뜻하고 품이 컸던 사람. 나조차 사랑하지 못했던 나의 썩 괜찮지 않은 모습까지 품어준 사람. 늘 내 가능성을 발견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준 사람. 부모님께도 기대하지 않았던 전방위적인 사랑을 쏟아준 사람.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처음으로 사랑의 힘을 믿게 한 사람.


당신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덜컥 믿어버린 게 너무나 큰 실수였나. 당신도 사람인데, 내가 왜 그렇게 이기적으로 굴었을까. 두 사람의 관계에서 왜 당신을, 우리를 보지 못하고 나만 봤을까.왜 그렇게 어리고 모자랐을까.


달라진 건 없지만

어느새 우리가 함께 한 시간만큼 긴 시간이 흘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듯 무신경하게 다른 일을 하며 보냈던 첫 번째 봄, 배신감에 분노하며 부산하게 움직였던 그 해 가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침잠했던 두 번째 봄, 그리고 깊은 우울에 잠겼던 두 번째 가을. 흐릿한 봄이 한번 더 지나고, 다시 또 봄이다.


어젯밤에 문득 당신 생각이 잠깐씩 떠올랐다 금세 사라진다는 사실에 놀랐다. 영원히 아물지 않을 것 같던 상실의 아픔도 아물어가는 걸까. 비로소 나는 당신이 더 이상 여기 없다는 유감스럽지만 분명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걸까. 어쩌면 다섯 번째 봄에는 당신을 더 이상 후회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오래전에 지나간 최선으로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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