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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트현 Mar 26. 2024

아니요와 융통성

그러니까 남의 이야기를 좀 들어주세요


나는 우유팩과 다 쓴 건전지를 모은다. 희한한 수집취미를 가진건 아니고, 우유팩과 다쓴건전지를 모아 주민센터에 가면 새것으로 바꿔주기 때문이다.

1리터 우유팩 기준 10장을 모아가면 두루마리 휴지 1롤을 준다. 폐건전지는 사이즈 상관없이 20개를 모아가면 2개 1세트를 준다. 예전에 살던 곳은 읍이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진짜 튀는 민원인이었다. 보통 이런걸 가져오는 사람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이따금 벤츠를 몰고 장애인석에 차를 댄 후(물론 장애인 주차 가능한 차였다)트렁크에서 한 덩어리의 우유팩을 “영차”하고 들고가시는 어르신도 봤다. 그 분은 차에 내릴땐 “벤츠오너”답게 정갈하고 적당히 거만하게 내리더니 우유팩을 들고 읍사무소의 문을 열자마자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옹색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의 뒤에 섰다. 직원은 어르신께 ”선생님, 저희 한 달에 1인당 50장까지만 가능하세요!“라고하자 어르신은 ”아유 우리 안사람이랑 애들걸로 해서 이거 다 쳐주면 안될까? 노인네가 여기 한번오는데 너무 힘들어“라고 앓는소리를 내셨다. 마음 약한 직원은 ”그럼 **군에 사는 자녀분이랑 사모님것 써서 하세요. 이번만입니다. 원랜 직접 다 오셔야 합니다.“라고 전했다. 어르신은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200장의 우유팩을 두고 나가셨다. 다음 내 차례. 나는 딱 50개를 가져갔다.

직원은 “다행이다”싶은 표정을 짓더니 “선생님, 저희 정책이 바뀌어서 한 달에 1인 50장까지만 받고 있습니다. 양해바랍니다”라면서 “많은 분들이 혜택을 받으실수있게 부득이하게 정책이 바뀌었어요. 한 달에 한 번이니 오늘 날짜를 기억해뒀다가, 차후 교환할 일이 있으면 한 달 뒤에, 그리고 예산이 정해져있어서 조기에 마감될 수 있으니 꼭 전화를 한 번 하여 수량을 확인하고 오세요“ 하면서 당부도 잊지 않았다

.

나는 직원의 세심한 안내에 감탄했다. 민원인이 두 번 걸음하지 않게 정확하게 일정과 수량을 알려주고, 왜 이렇게 하는지 납득할 만한 이유도 간결히 전했다. 무엇보다 이 두,세 문장 덕분에 직원도 “왜 안됩니까?”, “좀 해주세요”와 같은 곤란한 안내와 요구를 받는 일이 훨씬 줄어들것이다. 아, 이런 일머리 있는 직원 너무 좋다!


그리고 몇년이 지났다. 나는 **군에서 **구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다행히 집 근처 주민센터에서 우유팩과 건전지를 바꿔주고 있었다. 처음에 갔을때 이전 **군의 정책이 생각나서 “혹시 여기는 1인당 가져오는거 제한이 있느냐?”니까 따로 없단다. 가지고 오는 사람도 많지 않다고 했다. 과연 대장을 적는데 내 앞에 사람이 두 달 전에 가져간게 마지막이었다. 모이는대로 자주 와야겠다. 열심히 모았다.


지난주에 우유팩 100장과 건전지 100개가 모여 교환하러 갔다. 때마침 큰어린이가 전날 유치원에서 ‘환경보호’ 이야길 들었던터라 좋은 본보기가 되겠다 싶어 데려갔다.

주민센터에 도착해서 우유팩과 건전지를 교환하러 왔다하니 관련 부서로 안내받았다. 내가 들고온 것을 보곤 “아, 선생님 저희 1인 우유팩 50장이랑 건전지도 50개밖에 못바꾸세요”라고 했다. 그래서 “아, 그러면 1인 50장이라는게 한 달에 1인 50장인가요?”라고 물었다.

그런데 직원의 대답은 ”아니요“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 “아니요 선생님, 1인당 50장밖에 못바꾸신다고요”

그때 그 직원 표정. “이런것도 못 알아듣니?” 약간의 조소가 섞여있었다. 별안간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 된 나는 불쾌함에 다시 물었다.

“네 그건 알겠습니다. 제 말은 1인 50장의 제한이 1년에 1인 50장까지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기한이 별도로 있는지 문의드린겁니다”

그러자 그 옆에 직원 세 명이 내 말을 듣자 동시에 “아니요 선생님”이라며 “그러니까 1인당 50장까지만 바꾸실수있다고요”

자기들끼리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나 혼자 진상민원인이 되었다. 옆에 직원이 나를 <한심하다는듯> 보면서 ”몇 장 가져오셨는데요?”라고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우유팩 100개랑 건전지 100개요. 아, 그럼 아이데리고 오셨으니 저희가 <특별히>아이 이름 같이 써서 각각 50개씩 쓰시고 바꿔드릴게요.

선심쓰듯 말하며 “진상민원인은 그냥 떡이나 던져주자”는 말투, 자기들끼리 “저걸 왜 못알아들어?”라는 따가운 시선이 불쾌했다.

”하아“ ”그럼 이 사업기간이 보통 1년이니까, 사업기간 내 1인 50개로 알고 있겠습니다‘라고 하자 “또 시작이네”라는 시선, 그리고 또 ”아니요“


“아니요 선생님, 그러니까 1인당 50개까지만 바꾸실수있고요, 네네 사업언제끝날지 모르니 다음엔 전화하고 오세요. 저희도 예산이 언제 없어질지 몰라서요”


더 말했다간 내가 울화가 터질거 같았다. 다음엔 멀어도 다른 곳으로 가야지. 결국 1인 50장의 제한이 언제까지인지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진상취급받고 나왔다.

나와서 다시 대화를 곱씹어보니 그들 중 내 이야길 제대로 들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더불어 기본적으로 이 사업에 대해 이해도 하지 않고 있을것이란 확신도 들었다. “저러니 갑질공무원 소리나 듣지” 진상민원인 취급받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험한 말을 뱉고 다시는 그 곳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저들은 과연 내가 한 말을 제대로 듣기나 한 걸까? 몇년전 그 직원이 생각났다. 그 직원이었다면, 내가 우유팩을 바꾸러 왔다는걸 듣자마자 안내를 했을것이다. 1인당 50개 한정인데, 이번 사업이 1월부터 시작하는 연간사업이다. 그런데 예산이 한정되어 있어서 조기에 마감이 되거나 일정이 바뀔 수 있으니 다음에 혹시 교환할 일이 생기면 연락을 하고 오라고. 적어도 “아니요”소리는 안들었을 것이다. 1인당 50개, 아니요만 실컷 듣고 오니 하루종일 기분이 언짢다. 이걸로 민원을 넣어봤자 “아니요, 그러니까 1인당 50개만 교환 가능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답변만 들을게 뻔해서 그냥 뒀다. 결국 나는 1인 50개의 기한은 듣지 못하고, 그냥 다른 주민센터를 이용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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