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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트현 Apr 16. 2024

노란 마음아, 단단해져라

수많은 참사를 겪으며,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

나는 남의 일에 굉장히 무심하다. 주변에 누가 뭘 어땠다더라, 무슨 일이 있었다더라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구나”하고 만다.

공감능력이 없는걸까 싶을 정도로 감정의 동요가 크게 일어나지 않는 편이다.


나는 슬픔보단 분노가 더 익숙하다. 누군가의 안타깝고 속상하고 비통함에 공감하기 보단, 그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가해자의 행태와 사건의 시덥잖은 마무리에  분노한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엔 나의 분노 버튼을 누르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늘 끊이지 않았다.


씨랜드 참사를 보면서, 나는 여전히 호위호식하면서 참사의 현장 근처에 번듯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가해자들의 파렴치한 행동에 분노해서 그 가게의 후기를 쓴 이들의 sns를 다 찾아다녔다. 다행인건 내가 도착해있을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씨랜드 가해자가 운영하는 가게”라는 댓글을 달아놨었다. 그리고 유가족이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 한국어린이안전재단을 설립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들의 말에 힘을 보태고 싶어 정기기부를 신청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듣고, 죄를 뉘우치기는 커녕 안하무인으로 큰소리치는 가해자들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얼토당토한 장소에 추모공원을 세운 지자체의 행동에 화가났다. 땅값이 떨어진다는 천민자본주의에 입각한 그 이유가, 수백명의 생명을 앗아간 것과 동급 이상의 취급을 받는건 충격이었다. 그밖에 수 많은 참사가 있었다.  피해자는 있지만 정작 가해자는 이리저리 회피하다 유야무야해지는 방식은 늘 똑같았다. 늘 그랬다. 억울한 피해자와 당당한 가해자. 그리고 피해자를 마구 긁는 제3의 가해자들.


오늘, 세월호 10주기를 맞았다. 며칠전부터 노란물결이 출렁거리고 있어서 그제야 “아, 세월호!”라고 떠올렸다. 그 사건이 없었다면 지금쯤 그들은 늠름한 청년이 되었을 것이고, 이 사회 곳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봄이 왔지만 여전히 시린 겨울을 나고있을 수많은 유족과 차디찬 바다에 가라앉아버린 피해자,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다시 오지 못할 봄, 잔인한 4월을 겪고 있다.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해마다 4월이 되면 노란 물결을 출렁이며 목소리를 내고 있다. 1년 365일 매일 생각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딱 하루는 추모의 마음을 가지고자 한다.


하지만 진상규명은 커녕 사건을 덮으려 애쓰는 가해자들과 무너진 컨트롤타워를 옹호하는 이들, 그리고 그들의 뒤에 서서 피해자들에게 2차, 3차 가해를 하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보면 참담하다. 논리적이지 못한 주제에 궤변을 그럴듯하게 늘여놓고, 감정에 호소를 가볍게 덮으며 ‘시체팔이’라는 저급한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이들을 보면

과연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 <나도 이 사람들처럼 ‘공감능력’이 없나?> 싶어 소름이 끼친다.


누군가는 아픈 역사는 덮어야 발전이 있는거 아니냐고 한다. 또 다른 이는 “이거 말고도 사건사고가 많은데 왜 유독 세월호 가지고 이렇게 시끄럽냐”, “그저 한번씩 있는 전복사고”, “젊은 청춘이 죽은 일은 이것 말고도 많았다”고 유별나다 한다. 분향소에 찾아가 깽판을 치고, 세월호 현수막을 훼손하는 이들이 차라리 “그냥 재미로”라는 이유였다면 훨씬 인간적이었을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의 행태와 이유는 인간이길 포기한 금수의 행동이었다. 명분이라곤 그저 자기들의 이익과 풀지 못할 분노, <정의>라는 이름을 덧댄 넝마였을뿐. 그런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들이 말한 ‘사건사고’가 어떤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아는가. 인간적인 공감이 힘들다면, 최소한 이 사건이 왜, 어떻게, 끝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제대로” 알고난 후 큰소리를 쳤어야했다. (이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자녀가, 가족이 이 사건의 피해자여도 그렇게 말할건가요?”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애당초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을 가졌다면 이런 말을 함부로 할 수는 없다.)


내가 오늘을 추모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기에, 세금 내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기 때문에, “나라가 국민을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은, 이 휘청거리는 나라가 이리저리 흩날리지 않게 꾹꾹 잡아두는 깨어있는 국민들이 있고, 그들이 점점 목소리를 높이자 아주 조금씩이나마 변화되고 있는게 보인다. 부디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더는 일어나지 않기를, 그리고 그들의 희생이 더 참담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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