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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너지 Nov 28. 2020

나의 처음을 만들어준 친구 S에게



S와는 대학 1학년 처음 만났다. 당시 서울 친구를 처음 사귀어본 나는 부드러움 속에 감춰진 묘하게 깍쟁이 같은 느낌에 한껏 주눅 들어 있었다.  와중에 같은 분반으로 만난 그녀는 서울 태생에 하이톤 목소리를 가졌음에도 부산에서 같이 놀았던  같은 편안함이 있었다. 구김 없이 밝은 모습이나 감정에 솔직하고 털털한 모습이 좋았다. 떡볶이를 좋아했던 그녀와  다른 친구,  명이서 떡튀순을 시켜먹 낯선 포항에서의 삶을 서로 다독이며 대학 1학년을 보냈다. 그로부터 12년째, 그녀는 여전히 나의 사랑하는 친구이고 그녀와  많은 일이 있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개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1년 추석

우리 집은 차례도 지내고 아버지가 명절에 엄격하신 편이라, 명절을 집에서 보내지 않은 적이 거의 없다. 남들이 명절을 끼면 황금연휴라고 해외여행을 떠날 때에도 나는 거의 부산 집에서 보냈다. 그런 내가 최초로 명절에 본가에 내려가지 않은 게 2011년 추석이었다.


그 해 봄 사고가 났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는 말이 있는데, 그때 정말 허리가 끊어졌다. 수술하고 한 동안은 베개를 못 벨 정도로 허리가 아팠고 허리가 끊어지면서 배꼽 밑으로 신경이 마비되어 걷는 것은 물론, 혼자 돌아눕지도 못했다. 덕분에 꼬박 3개월을 침대에서 지냈다. 수술 부위가 아물면서 혼자 앉는 것부터 시작해 휠체어를 타거나 혼자 씻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병원 안은 휠체어로 지낼 수 있도록 모든 게 맞춰져 있었고 그 환경에서 잘 지내는 게 1차 목표였다. 병원 생활이 익숙해지자 병원 밖이 그리워졌다. 그러나 병원 로비만 벗어나도 세상은 무서운 것 투성이었다. 경사 지거나 포장이 잘 안 된 길, 수많은 턱에서 종종 넘어졌기에 병원 밖에서는 항상 긴장해있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휠체어 탄 장애인의 삶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옆에서 본 적도 없는 낯선 삶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두려웠다.


그러던 중 추석이 점점 다가왔다. 병원은 경기도 일산에 있어서 부산에 못 가고, 대신 부모님이 추석 차례를 지내고 올라오겠다 했다. 이번 명절은 조용히 지내겠구나 했다. 그러던 중 S에게 연락이 왔다.

“병원에서만 심심하지 않아? 놀러 가자”

병원 생활에 대한 연민이나 휠체어 타는 친구에 대한 조심스러움은 없었다. 그녀에게는 친구 이원지만 있을 뿐이었다. 병원 근처에 나가는 것도 망설이던 나와 달리, 그냥 하자고 말하는 그녀가 신기하면서 대단하고 또 고마웠다.


그녀는 추석 연휴 첫째 날 일찍 일산으로 오겠다 했다. 영화관과 음식점에도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지 확인해놨다며 일산 라페스타 거리에서 만나자고 했다. 보호자를 동반하고 병원 근처 산책은 해보았지만, 병원 밖 멀리 그것도 혼자 나가는 건 처음이었다. 택시를 타야 했기에 약속 며칠 전부터 휠체어에서 차로 옮겨 타는 연습을 했다. 당일이 되어서는 승차거부로 택시는 못 탔지만,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승차 거부하는 모습을 보고 태워주셔서 무사히 약속 장소에 갈 수 있었다. 그 날 우리는 영화도 보고 스티커 사진도 찍고 밥도 먹고 놀았다. 대학교 1학년 때 시험 끝나고 시내에 나가 놀던 느낌이었다. 사람들의 시선도 생각보다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이후로 나는 병원 밖을 자주 나갔다. 친구들이 병문안 오면 병실에서 보는 대신, 밖에서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고 돌아왔다. 또, 병원에 1년 더 있다가 2012년 2학기에 복학하려는 계획을 수정하여 2012년 1학기에 복학하기로 했다. S도 빨리 학교로 돌아오라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혼자 병원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면 어차피 혼자 지내야 하니까 - 혼자 씻고 혼자 식판도 반납하고 혼자 밖으로 다녔다. 곧 복학을 했고,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완전히 독립할 수 있었다.


2014년 여름

미국에 Project Walk라는 재활센터가 있다. 우연히 알게 됐는데 척수손상 환자만 전문적으로 재활한다고 했다. 대학원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길게는 못 가고 교수님께 허락받아 6주 정도 미국에 다녀왔다. 샌디에고 근처에서 에어비앤비로 장기 투숙했다. 숙소에서 재활센터까지 차를 타면 20분, 대중교통을 타면 1시간 반 정도 걸렸다. 하루에 2시간씩 재활 운동을 하고 주변을 놀러 다니며 지냈다.


필라델피아에서 유학 중이던 S는 재활 일정이 끝나갈 무렵에 내가 묵던 숙소로 놀러 왔다. 우리에게는 딱 일주일의 시간이 있었고, 하고 싶은 게 많았던 S와 미국이니까 뭐든 다 해보자 싶었던 나는 일주일이 꽉 채워 놀았다. 샌디에고 라호야 절벽에서 태평양 바라보며 패러글라이딩 하기, 물범 많은 지역에서 카약 타면서 물범 구경하기, 세계적으로 유명한 샌디에고 씨월드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 타고, 돌고래쇼 보기 - 둘 다 물에 흠뻑 젖어서 깔깔깔 웃었던 기억이 난다. 에어비앤비 주인 아줌마도 S를 참 좋아했다. 우리는 틈틈이 한인마트에 같이 가거나 김밥도 해 먹고, 디너쇼를 같이 보기도 했었다. 일주일이 끝나갈 때쯤 마무리로 배를 타고 일몰을 보려고 했는데 시간이 늦어서 보지 못했다. 구글 내비게이션이 잘 안되던 때라 길을 제대로 못 찾고 허둥지둥하다가 배 시간에 늦었다. 속상한 마음에 짜증도 냈는데 그걸 쿨하게 다 받아준 S.


내가 탔던 패러글라이딩, 샌디에고 동물원 입장권, S와 같이 만들었던 김밥


정말 꿈같은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날 S를 샌디에고 공항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 얼마나 허전했는지 모른다. 우리 두 사람에게 좋은 추억이지만, 한 편으로 내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나는 두려움이 너무 많았다. 스스로가 너무 작고 못나게 느껴져서, 남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 항상 걱정이었다. 뭐든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함께, 확실히 검증된 certificate이 필요했다. (교수님께는 죄송하게도) 학계에 큰 뜻이 없었지만 박사 학위는 못난 내가 그나마 덜 차별받고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는 마중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여행 이후 나는 1년 반이나 보낸 석박사 통합과정을 석사 과정으로 바꾸었다. 박사 학위가 있으면 좋겠지만 (학부 4년, 대학원 1년 반을 보낸)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두려움을 깨는 게 내 장기적인 인생에서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S 덕분에 미국에서 보낸 한 달간 내가 할 수 있으리라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일을 많이 해보았다. 두려움을 잠시 내려놓고 하고 싶은 대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버렸다.


이것 말고도 지난 12년간 S와 있었던 일이 참 많다. 수많은 순간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두려움이나 불안함 같은 감정에 휩싸여 있을 때 그녀는 언제나처럼 등장하여 손을 내밀어 주었다. 2011년 추석 그 날 S가 나를 병원에서 끄집어 내주지 않았다면, S의 제안으로 미국에서 생각지도 못한 경험을 해보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있었을까. 내 인생에 큰 전환점을 함께 해준 S. 그런 그녀가 인생의 큰 변화를 목전에 두고 있다. 그녀가 내게 했듯이 나는 그녀에게 해줄 수 없겠지만, 이 글이 그녀에게 힘이 된다면 참 기쁘겠다. S야, 항상 응원해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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