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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너지 Nov 08. 2020

휠체어 탄 스페인 여행에서 받았던 크리스마스 선물 1

작년 크리스마스는 남자친구와 스페인에서 보냈다. 연말에 연차가 남아 즉흥적으로 떠난 여행이었다. 엄마를 모시고 <꽃보다 할배> 이서진에 빙의해 동유럽 여행을 다녀온 지 딱 두 달만이었다. 그땐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준비했는데, 남자친구와 가는 것이기도 하고 즉흥적으로 떠나는 거라 준비할 겨를이 없었다. 남자친구가 수년 전 스페인에 다녀오기도 했고 워낙 유명한 관광지가 많아 준비 없이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게다가 바르셀로나는 휠체어 접근성도 좋고 관련 안내도 잘 되어 있는 편이라 로드뷰를 미리 확인하거나 문의해야 할 일도 적었다. 우리는 굵직한 스케줄만 정한 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2월 23일 바르셀로나에 도착했고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연휴가 되자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여행 전 크리스마스 당일 가게가 많이 쉰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많이 닫을 줄이야. 관광지는 물론,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챙기는 일도 쉽지 않아 보였다. 다행히(?) 크리스마스 당일 오전에 여행 스냅을 신청했는데, 스냅 작가님이 식당을 추천해주신 덕분에 예약이 딱 한 타임 남은 식당에서 근사한 점심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우리의 소중한 0.5일을 날릴 수 없었다. 밖에서 구경할 수 있는 고딕지구나 가우디가 건축한 건물은 이미 첫날 구경한 터라, 급하게 안 가본 관광지 중 갈 수 있는 곳을 물색했다. 그러다 '구엘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친구는 지대가 높아 경사를 올라가기도 힘들고 날씨도 추우니 가지 말자고 했다. 괜히 가지 말라고 하니 더 가고 싶은 마음에 고집을 부렸고, 그럼 택시라도 타자는 남자친구 말을 듣지 않고 '지하철'을 이용해 '구엘공원'으로 향했다.


대체로 정확한 길을 안내해주는 구글이지만, 많은 지도 서비스가 그렇듯 가끔 매우 돌아가거나 휠체어로 다니기 힘든 길을 알려줄 때가 있다. 그 날 구엘공원 가는 길이 그랬다. 구엘공원에 가기 위해 내렸던 지하철역은 플랫폼에서 지상으로 나가는 길에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우리 둘은 ‘어떡하지’를 연발하며 당황해 하고 있었다. 한 청년이 주변을 한참 서성이다 우리에게 말을 붙였다. 여기는 엘리베이터가 없는데, 괜찮으면 도와주겠다며 같이 휠체어를 들자고 했다. 와, 감사합니다! 그 청년과 남자친구가 나를 휠체어째 들고 계단을 올랐다. 지상에 다다르자 그 청년은 환하게 웃으면서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남기고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조금 더 가니 자동차 가게에 예수님 탄생을 나타내는 모형이 있었다. 

- 우리 그 청년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것 같아.
- 그러게. 크리스마스 같다!
우연히 만난 예수님의 탄생. 이걸 보니 그 청년의 도움이 크리스마스 선물같았다.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경사.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앞에 펼쳐진 건 끝이 보이지 않는 경사였다. 구글 맵이 분명 저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택시를 탔어야 했는데…'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남자친구는 “할 수 있어. 가보자”라고 힘차게 외치며 내 휠체어를 뒤에서 밀기 시작했다. 남자친구의 숨소리가 거칠어질 때쯤 어디선가 “Can I help you?” 서툰 영어가 들렸다. 그 길을 함께 올라가던 중년부부였는데 아저씨가 자기 팔근육을 자랑하면서 같이 밀자고 했다. 다들 이렇게 도와주시다니, 너무 감사했다. 'One, two, three!' 아저씨와 남자친구가 호흡을 맞춰 나를 밀기 시작했다.


긴 - 경사로의 끝은 에스컬레이터였다. 이쯤 되니 구엘공원이고 뭐고 그냥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에스컬레이터에 휠체어를 걸쳐서 올라가 보자고 했다. 몇 년간 단련된 그의 휠체어 다루는 스킬은 그 날 빛을 발했다. 에스컬레이터는 짧게 여러 단으로 나눠져 있었다. 그런데 2번째인가, 3번째인가 에스컬레이터가 고장 나 있었다. 앞으로는 고장 난 에스컬레이터와 계단, 뒤로는 상행 에스컬레이터와 계단뿐이었다.

진퇴양난의 순간. 황망해서 웃음이 났다. 허허

진퇴양난의 순간, 우리가 에스컬레이터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브라질 부부는 선뜻 다시 도와주겠다고 했다. 나는 남자친구에게 업히고 아저씨가 휠체어를 들어주었다. 치마를 입은 내 뒤를 아주머니가 가려주었다. 정상에 다다라 짧은 듯, 길었던 에스컬레이터를 뒤로 한채 나는 휠체어가 안전하게 안착했다. 그곳은 스페인이었고 햇살은 따뜻했지만 12월 말이었다. 차가운 날씨에도 거친 숨을 내쉬면서 땀을 뻘뻘 흘리는 두 사람을 보니 울컥했다.


"우리 기념으로 사진 찍어요” 남자친구가 제안했다. 그 사이 나는 울음이 터졌다. 무슨 감정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미안함과 고마움 그 중간 어디쯤이었던 것 같다. 계속 훌쩍거리는 나를 아주머니가 꼭 안아주었다. 다 그분의 뜻이자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앞으로 더 큰 행운이 함께 할 거라고 말해주셨다. 오늘은 나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라는 인사도 함께 했다.

눈가가 촉촉. 두 분 감사했어요

이 모든 상황이 내 인생 같았다. 장애물을 만나 힘들어하면, 감사하게도 누군가 나타나 나를 도와주곤 했다. 그리고 오늘 같은 순간에 항상 내 옆을 지켜주던 남자친구. 내 인생 꽤 괜찮네. 종교는 없지만 아주머니 말처럼 이런 게 그 분의 뜻인가 싶었다. 무심코 넘겼던 수많은 도움과 당연한 존재처럼 여겼던 남자친구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주려고 2019년 12월 25일 같은 크리스마스를 주셨나 보다. 메리 크리스마스!



2편에서 계속됩니다
https://brunch.co.kr/@wonjilee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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