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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첸 Jan 12. 2019

#12  웃으면서 하는 여행은 딱 보름까지


  차를 탄 지 두어 시간, 운전하던 브리짓이 슬슬 몸에 열이 나는지 위태롭게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검은색 두터운 잠바와 털모자를 차례로 벗었다. 우린 어느새 브루더호프를 떠나 잉글랜드 동부로 향하는 길이었다. 두 번째 호스트인 브리짓이 운 좋게도 우리가 있던 브루더호프 근처에 볼일이 있다고 하여 같이 가게 되었다.

  차에 올라탔을 때만 해도 70대 중후반의 할머니가 우리 몫까지 장거리 운전을 해주시니 미안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차 시동이 켜지고 전력 질주하는 그녀의 스피드를 체험한 우리는 몇 분 뒤 이럴 줄 알았으면 알아서 가는 게 나을 뻔했다는 표정을 암묵적으로 교환했다. 

  차선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며 운전하던 브리짓은 한 손으로 전화통화를 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결국 초등학생 이후 울렁이는 속을 부여잡다 못해 갓길에 두어 번 내려 속을 게워내고, 원체 남의 차를 잘 못 타는 아빠도 손잡이를 두 손 꼭 잡고 놓지 못했다.

  네 시간이 열 시간처럼 느껴지던 긴긴 시간이 흐르고 어두운 밤이 돼서야 핀챔스 농장Fincham’s farm에 도착하였다. 나는 멀미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부엌은 어두컴컴하고 시끌벅적했다.

  몇 달은 안 감은듯한 머리와 술 먹은 것처럼 벌게진 얼굴을 한 남성이 걸걸한 목소리로 혼자 떠들고 있었다. 형광색 공사장 조끼를 입은 다른 사람은 까닭 모르게 주변을 뱅뱅 걸어 돌아다녔다. 그나마 평범해 보이던 한 남성과 인사를 나누었고, 씨익 웃는 그의 벌어진 입 틈 사이로 구멍 뚫린 흉측한 앞니와 마주쳤다. 그러자 퍼뜩 브리짓이 차 안에서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집은 노숙자나 마약, 알코올 중독자들이 다시 사회생활에 적응할 때까지 같이 지내는 작은 공동체예요.’


  강렬했던 그들의 첫인상은 그래 봤자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며 가벼이 여겼던 내 마음을 무참히 꺾어버렸다.


  ‘이 사람들하고 보름 동안이나 한집에서 산다고?’


  잠시 긴장으로 멈춰졌던 멀미 기운이 다시 널뛰기 시작했다.








  브리짓은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농장 소개를 해주겠다며 우리를 너른 뒤뜰로 데려갔다. 시작부터 부산스러웠다.

  밭에는 마늘이 송송. 그 옆으로 토마토 줄기는 누렇게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목장에는 조랑말과 얼룩 돼지가 땅에 얼굴을 박고 풀을 뜯느라 인사를 해도 본체만체했다.


  “요즘 너무 바빠서 하나도 못 치웠어요. 목장에 똥도 치워야 되고, 온실도 어서 정리해야지.”


  브리짓은 습관인지 민망해서인지 같은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농장에서 생활하는 마약·알코올 중독자들에게 가끔 자활훈련으로서 농장 일거리를 제안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만한 상황도 못되어 작은 텃밭 정도만 유지한다고 덧붙였다.


  “자질구레한 일들이 많겠구나.”


  뒷짐 지고 농장 소개를 듣던 아빠가 조용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농기구 창고에는 녹슨 낫과 목 빠진 삽자루는 바닥에 나뒹굴고, 레이크는 삐걱거렸다. 농장 소개는 엉킨 노끈 타래를 풀다가 두서없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내가 농장 식구들한테 얼마나 떵떵거렸는데 이게 뭐야...’


  나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유럽 시골마을에 있는 농장들을 돌아다니며 많이 배워오겠다고, 선진지 견학과도 같은 멋진 여행이 될 거라 자부했었는데 첫판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19세 여동생은 학교를 자퇴하고,
53세 엄마는 교회를 그만두고,
55세 아빠는 밭을 맡기고,
26세 나는 가족과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어려운 가족(이라는)여행
성질부리는 큰 딸이 302일 간 기록합니다.

숨겨둔 장면은 여기에서 
https://www.instagram.com/travel_of_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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