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빈아. 그렇게 하면 안 돼. 봐봐. 이렇게 해야지.”
아빠는 가시덤불을 자르는 내게 뿌리를 찾아 한 번에 잘라내라며 시범을 보였다.
“뿌리를 찾는 게 어려우니까 그러지.”
내게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덤불 사이에 뾰족뾰족한 철망이 한데 엉켜있어 쉽지 않았다.
우리 넷은 브리짓과 영화 가위손의 주인공처럼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던 목장 울타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안 하면 두 번 일이야.”
일하면서 무심코 내뱉는 아빠의 말들이 점점 거슬렸다.
다음 날 감자를 심기 위해 이랑을 만들 때도 그랬다. 이른 봄 잡초를 걷어낸 땅을 내가 괭이로 후려치고 지나가면 엄마가 뒤에서 흙 뭍은 풀을 탈탈 털어 밖으로 내던졌다. 한 고랑 두 고랑 모습이 갖춰져 가자 다른 일을 하던 아빠가 지나가며 한 소리 했다.
“감자 이랑은 더 깊이 갈고 높게 만들어야 돼.”
감자 농사만 수십 번도 넘게 지은 대선배의 잔소리였다.
“괭이 줘봐. 보여줄게.”
하지만 나는 못 들은 척 계속 괭이만 후려쳤다. 아빠는 시간이 흘러도 아무 반응이 없는 내 태도에 언짢았는지 가만히 기다리다 끝내 조용히 사라졌다.
“야, 너 왜 아빠가 말하는데 대답을 안 해?”
엄마가 서둘러 물었다.
“아니, 계속 잔소리잖아. 짜증나게.”
“그게 왜 잔소리야. 가르쳐주는 거지.”
엄마도 아빠와 한패다.
“아니, 내가 그걸 모르나. 그냥 일하는 꼴을 못 보잖아. 아주, 자기가 맨날 옳아요.”
아빠가 들을라 말꼬리는 흙 속에 파묻었다.
“아이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제 그만 정리할까요?”
일에 열중하던 브리짓이 굽은 허리를 피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일치감치 시간을 확인하던 수빈이는 이미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었고, 엄마도 일 끝나는 시간에 맞춰 뒷정리를 시작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저 멀리 농기구에서 몸을 떼지 못하는 유일한 한 명이 있었으니….
“아빠! 여기까지 하재. 들어가자!”
수빈이가 큰 소리로 불렀다.
아빠는 먼저 들어가라며 손을 휘이 두 차례 젓더니 곧 다시 땅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독히도 고독하게 일해 온 습관은 여기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빠는 귀농하기 전 직장에서나 그 이후에도 많은 일을 혼자서 하는 사람이었다. 해마다 4톤 가까이 되는 배추도 혼자서 손수 절여 팔아왔고, 강원도 산 중턱의 우리 흙집도 3년 동안 혼자 지었다. 동네 할머니들에게 품삯을 드리며 일손을 더는 것도 싫어했다. 기어코 자기 맘에 들 때까지 일을 해야 속이 풀리는 근성은 그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런 아빠에게 내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리 없었다.
초저녁 스산함을 옷에 묻히고서야 방 안으로 들어오는 아빠를 보자 가시가 돋쳤다. 못된 딸내미는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 말하는 아빠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자꾸만 내 눈은 아빠의 굽은 허리와 어깨 주변을 맴돌았다.
19세 여동생은 학교를 자퇴하고,
53세 엄마는 교회를 그만두고,
55세 아빠는 밭을 맡기고,
26세 나는 가족과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어려운 가족(이라는)여행
성질부리는 큰 딸이 302일 간 기록합니다.
숨겨둔 장면은 여기에서
https://www.instagram.com/travel_of_fami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