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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리어스 Mar 27. 2020

국제 연애의 끝은 고요하다

슬플 만큼 빠르게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기

2019년 11월 7일 일기.


오늘은 부리나케 일어나 오전 일찍 지방 감리에 다녀왔다. 가을을 탄다며 센티해진 엄마에게 ‘나는 가을 안 타던데?’하며 떵떵거렸는데... 지금 보니 나도 엄마와 별 다를 것 없다.



헤어진 지 한 달 정도 되었나.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헤어지자마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뉴욕 여행 준비를 마무리해서 떠났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야 조금의 우울감이 찾아오는 바람에 실감이 났다.



그와 나는 국적도 사는 곳도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도 달랐지만 노력한다면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볼 수 있었던 비교적 운 좋은 관계였다. 나와는 다르게 겸손하고, 누구보다 성숙하고 따뜻했던 사람. 하지만 이 관계가 끝나고 나니 내가 정말 연애를 하기는 한 것인지 의아하기도 하고, 반대로 너무 지나치게 애틋한 연애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비행해서 만나러 갈 때면 퇴근을 기다리던 오피스 아래층의 스타벅스와 요거트



서럽게도, 우리는 크게 싸워본 적도 서로를 관계의 밑바닥까지 속상하게 한 적도 없었었다. 하지만 결국은 평범하게 헤어졌다. 서로가 노력을 한다고 모든 것을 다 얻을 수는 없는 것을 알지만, 내게는 오로지 우리가 늘 평행선 위를 걷는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노력한 시간들과 고군분투가 있었을 뿐 조금이라도 그 길이 좁혀지지 않는 것에 대한 압박과 초조함에 불안해했다.



한국 땅 위에서 그를 만나지 않는 대부분의 삶-직장 생활-은 나를 어느 정도 갈아넣음으로써(?) 점점 안정이 되어가는데. 언어에 대한 부분과 접점이 될 수 있는 커리어를 위해 이렇게 시간을 쪼개 가며 고생을 하는데. 그런데도 우리 둘만은 항상 이벤트처럼 즐겁게 만났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헤어지곤 하니, 그 간극이 언제부터인가 나의 현실과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그리고 문득 어떤 날은 마음이 뻥 뚫린 듯 휭 허전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에게 내 마음을 다 털어놓고 반년 정도 지났을 때, 문득 나는 ‘계획이 없는 이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음’을 역으로 인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시간이 흘러 전화를 하며 결국 헤어지던 날, 그는 ‘너는 아니겠지만 나는 너무 갑작스럽다' 고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모든 걸 이해하는 것도 같았다. 서로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는 나에게 매달리지도 않았고 한 번 화를 내지도, 회유를 하지도 않았다.



얼마 후 한국에 들어와서 예의 있는 맺음을 하는 것도 참 그 친구다웠다. '우리 둘 다 참 열심히 했어. 하지만 큰 변화를 만들지 못한 것도 사실이야' 하고 차분하고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마치 그를 친구로서 처음 보았던 몇 년 전 그날과 똑같이 그는 정직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나는 몇 초간 후회도 하다가, 금방 ‘모든 게 이제 끝났구나. 이제 마무리가 됐구나’ 하는 이기적인 안도감에 눈물이 조금 고이기도 했던 것 같다.



마지막 그의 말대로 '우리 사이에 큰 변화는 없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노력하고 울고 웃던 예쁜 기억들은 여러 나라의 공항들에, 길 위에, 공원에, 레스토랑에 남아 있겠지만.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마지막 그의 말대로 '우리 사이에 큰 변화는 없었던 것’은 참 씁쓸하고 냉정한 사실이었다. 그와 서로 노력하면서 얻었던 수많은 시간과 노력들은 나의 일부가 되었겠지만, 결국은 내가 정말 찾고 싶었던 '진전' 같은 것은 더욱 만들어 내기 어려운 것이었겠지.



떨어져 있던 서로의 삶으로 돌아가고 난 이후, 내 일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티가 나지 않았다. 그의 일상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국제 연애의 끝은 그렇게 허무할 만큼 고요했다.



Happy h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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