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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들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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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빨강 Oct 12. 2021

물에 빠지면 누굴 먼저 구하겠습니까?

나는 어떤 엄마일까? 나를 늘 불편하게 만든 질문의 어떤 답

한참 단잠에 빠져 있을 때였다. 귓가에서 웽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밤의 불청객 모기였다. 가을 늦더위에 창문을 열어둔 사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모기 소리는 귓가를 한 번 더 맴돌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잠의 세계에 몸을 절반쯤 걸친 몽롱한 상태로 순간 심각하게 고민했다. '물리면 얼마나 물린다고. 그냥 자?'  


혼자였다면 더는 고민하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다시 잠들었을 테다. 운이 좋으면 한 두 군데 희생으로 달콤한 잠을 계속 청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몰라도 누군가와 함께 일 때 모기는 나를 두고 곁의 사람만 공격한다. 곁에는 아이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세상모르게 자고 있다.


하필 남편도 없는 밤이었다. 그가 있었다면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모른 척 잠을 다시 청했을 테다. 하지만 그날 밤은 아니었다. 내일 아침 여기저기 발갛게 부어오른 모기 물린 자국을 긁어댈 아이를 떠올리다 잠이 덜 깬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낮에 몇 년 만에 근력운동을 좀 했더니 '아고고고' 곡소리가 난다.


나의 움직임과 소리에도 아이는 어둠 속에서 곤히 잠들어 있다. 살금살금 침대 곁에 있는 서랍장에서 부드러운 손수건을 찾아 아이 눈을 살짝 덮어주고 불을 켰다. 순간 눈부심에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다행히 아이는 미동도 없다. 숨소리도 변함없이 고르게 들려온다. 마음을 놓고 모기 잡을 준비를 한다. 


매의 눈으로 모기를 행방을 좇는다. 아무리 찾아봐도 온데간데 보이지 않는다. 연한 회색에 가까운 화이트 계열의 바탕에 부드러운 은빛의 세로 줄무늬 벽지와 채도가 낮은 형광등 불빛이 만드는 그늘, 비문증이 있는 오른쪽 눈 때문에 그림자만 어른거린다. '찾았다!' 싶으면 내 눈 안에 떠다니는 초파리가 만든 착각이다.


아이가 눈을 떴다. 수건을 들치고 불빛에 잔뜩 찡그린 얼굴이 "지금 뭐 하냐?"는 물음을 담고 있다. "모기가 들어와서 엄마가 잡을 테니까 걱정 말고 얼른 자!" 걷어차 낸 이불을 배에 다시 덮어주자 물린 부위를 잠시 긁어대더니 거짓말처럼 아이는 다시 잠들어버렸다. 얼른 모기를 잡고 아이 곁에 눕고만 싶다.


'어디로 꽁꽁 숨었을까? 다시 소리 날 때까지 불이라도 꺼 둘까?' 망설이던 차, 원목 침대의 프레임 끝에 모습을 교묘히 감추고 있던 녀석을 발견했다. 잠든 아이를 건드리지 않게 조심조심 하지만 빛의 속도로 녀석을 덮쳤다. 야심 찬 한방에도 실패. 그렇게 세 번의 헛방 끝에 네 번째 만에 드디어 녀석은 최후를 맞았다.


잡은 모기를 휴지로 꼭 싸니 빨간 피가 조그마한 점이 되어 휴지를 물들였다. 물린 팔꿈치를 왼쪽 검지 손가락으로 가만히 쓰다듬는데도 아이는 해맑은 표정으로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에 빠져있었다. 왠지 울컥했다. 손을 씻고 돌아와 아이의 이불을 다시 만져주고 곁에 누웠다. 잠은 멀리 달아난 후였다. 한참 뒤척였다.


  



간혹 '물에 빠지면 누구를 가장 먼저 구하겠는가?'라는 질문에 아이 먼저 구하겠다.'는 대답을 들을 때면 '나는 과연 한 치의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이 아이 먼저 구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차 뒤에 붙여 둔 '사고가 나면 아이 먼저 구해주세요.'라는 문구도 (다른 이유도 있지만) 볼 때마다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자들에게 군대와 축구 이야기가 있다면 여자들에게는 임신부터 육아에 이르기까지 많은 무용담이 있다. 아이를 위해 어떤 태교를 하고 준비를 했다거나 어떤 부분을 희생하고 챙기고 있다는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불편했다. 세상에 넘치는 모성애에 비해 나의 그것은 작고 초라했고 때로 부끄러웠다.


어린 시절 엄마는 종종 내게 '자기만 아는 녀석'이라고 혼을 냈다.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동생 챙기는 것도 깜빡하고 거기에 몰두하고 마는 성격 때문이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걸 하느라 동생을 챙기거나 엄마와의 약속을 자주 잊고는 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다소 그렇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직장 일 등으로 바쁠 때 나는 때로 아이의 일을 까맣게 잊었다. 준비물도 깜빡하고 챙기지 못한 것은 기본이고 야외활동 도시락 싸기를 놓친 적도 있다. 나 대신 아이를 봐주신 친정엄마가 아니었다면 아이는 당황스러운 순간을 더 자주 마주 했을 것이다.


올해는 육아휴직을 한 덕분에 아이와 붙어지내지만 잘하고 있는 건 아니다. 휴직한 김에 내 할 일을 하느라 아이와 함께 하려던 계획들의 대부분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다른 사람의 멋진 육아기를 볼 때면 의지가 불끈 치솟다가도 내 할 일들의 일정에 따라 계획단계에서 흐지부지되거나 잠정연기되고 말았다.


자신의 목숨과 인생을 자신 있게 걸 수 있다는 많은 엄마들이 부지런히 아이에게 좋은 것들을 해줄 때 내 할 일부터 머릿속에 꽉 차 여유 없이 허덕인다. 이 고질병은 어릴 때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잘 고쳐지지 않을 것 같다. 아이가 자라 내 곁을 떠나는 순간까지, 아니 평생 그럴지도 모르겠다.


미안함과 후회가 많지만 아이도 '엄마는 원래 그래.' 라며 다 받아준다. 심지어 현재 진행형인 내 꿈에 있어 아이는 유일한 가족 독자이자 상담사다. 아이는 늘 내가 준 사랑을 몇배로 부풀려 돌려주고 심지어 댓가도 바라지 않는다. 자꾸 "이거 다 하면, 그거 하게 해 줄께."라는 조건부로 아이를 대하는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모기를 잡아줄 나를 믿고 금세 다시 잠에 빠진 아이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한참을 뒤척이며 떠올렸던 어떤 소망들을 되새겨본다. 여전히 나는 물에 빠지면 제일 먼저 아이를 구할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아이만 생각하는 엄마는 못되지만 마음 하나만은 한결같이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 엄마는 노력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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