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이 열흘 남짓, 아이의 초등학교 첫여름방학도 1주일 정도 지나면 끝이 난다. 방학 숙제 진도 체크표를 채워가야 하는데 그림일기는 틈틈이 해 오긴 했지만 줄넘기와 실로폰 연습은 대부분 X표가 되어 있고, EBS 방학생활도 몰아서 시청 중이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남자'아이의 육아에 있어 엄마의 역할은 언제 어디까지인가, 습관은 언제가 되어야 잡힐까 종종 궁금하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이 반복을 거듭하면 어느 정도 훈련이 되는 걸 보면 '언젠가는 되겠지.' 희망을 품어보지만, 그것도 시작을 해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숙제하자.'는 말이 점점 3단 고음이 될 때까지 아이는 딴짓의 극치를 보여주며 엄마의 인내심이 어디까지인지 시험에 들게 한다. 방학의 묘미는 게으름과 벼락치기인 걸 알고 많이 풀어주었는데도 해도 너무하는 녀석이다.
육아휴직을 앞두고 내 마음속에는 인별 그램이나 블로그에서 종종 마주쳤던 이상적인 육아(저 아래 커다란 남쪽 섬 동네에서 한 달 살기 같은) 아름다운 그림만 가득했다. 아이 손 잡고 다정하게 학교를 오가고, 마당 있는 돌담집에서 둘이 함께 붙어 앉아 그림책도 읽고 바다에서 조개도 파고 게도 잡으며 석양이 지도록 아이를 놀리고 나는 좋아하는 책을 실컷 읽고 글도 마음껏 쓰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심해지는 코로나 때문에 당장 한 달 뒤를 기약하기 어렵고, 매일 하루 삼시 세끼를 챙기느라 장 보고, 재료 손질하고, 만들고, 치우는 일과 아이의 일과를 따라다니며 챙기는 일로 대부분 양분된다. 아직도 살림이 서툰 내게는 뭐 하나 쉬운 것 없이 모든 것이 다 만만치 않지만 가장 큰 에너지를 요하는 게 아이의 각종 생활 습관 잡는 것과 학습에 관한 일인 것 같다.
어떤 자식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는데, 우리 아이는 그런 과가 아니다. 하나를 가르치면 하나를 모르는 일도 허다하다. 딴짓은 또 얼마나 많이 하는지? 하루 두 바닥의 수학 문제를 푸는데 꼭 좋아하는 에베레스트 산과 만년설을 그리고 시작한다. 그 모든 과정을 꾹 참고 기다리는데 설명한 걸 처음 듣는 것처럼 할 때는 정말 속에서 열불이 훅 올라온다.
'아니, 좀 전에 막 설명했는데 왜 이해를 못하냐고?'
종종 잔머리 굴리는 걸 보면 머리가 꽤 좋아 보이기까지 하는데 역시 고슴도치는 제 자식도 예뻐 보인다는 말이 맞는 건지, 기대치가 높은 건지 아이와 책상에 앉아 있을 때면 자주 내 인내심과 인간성의 한계를 경험하고는 한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베레스트 산 옆에 대형 비행기를 그리는 아이에게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려는 순간, 죽비로 등짝 맞듯 어린 시절 나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공부하자고 앉히면 자꾸만 그림을 그리고 책상을 청소하고 갑자기 책이 읽고 싶어지는 것. 딱 내가 그랬다. 세상 산만하고, 하나를 가르치면 그 하나조차도 금세 까먹어버리고 처음 듣는 척해서 엄마에게 꿀밤은 또 얼마나 맞았던가... 그 명징한 진실을 깨닫자 입 밖으로 막 나오려던 고함이 '흐읍' 소리를 내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의 마음을 이제야 알겠다.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 답답함이 걱정이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러나 그 말로 종종 상처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어떤 기억은 아직도 마음속 깊은 바닥에 남아 서툰 일을 대하는 데 주저하게 만든다. 그걸 잘 알면서 아이에게 되풀이할 수는 없는 일. 길게 한숨을 내쉬며 심기를 가다듬는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쳇, 누가 지었는지 정말 팩트 폭격이다. 아이도 내 눈치를 보며 비행기 그리던 연필을 놓지만 문제를 절로 풀 수는 없는 법이다.
긴 지문을 한 줄씩 번갈아 읽는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가며 천천히 설명을 하고 다시 문제로 가서 반복되는 패턴과 원리를 한번 더 설명한다. 비슷한 문제들을 몇 번 더 풀어본다. 머뭇거리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덜 어려워하는 것 같다. 힘겹게 오늘의 진도를 마친다. 내일 이걸 또 되풀이할 생각에 진이 빠진다.
얼마 전 지인이 알려줘서 등록한 단톡방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건의 교육과 관련된 정보가 쏟아진다. 우리 아파트에서 만든 교육공동체 커뮤니티인데 너무 많은 정보가 오간다. 매번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하고 +999의 빨간 동그라미 채로 놔두기 일쑤지만 정말 똑똑하고 잘난 아이들도, 부지런하고 대단한 부모들이 많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다.
고개를 들어보니 쥐꼬리만 한 진도에 이미 시곗바늘이 1시간이 훌쩍 넘어가 있다. 딴짓과 누웠다 앉았다를 반복한 결과다. 나도 모르게 흘러나와버린 한숨 소리에 아이가 많은 표정을 담은 눈으로 이야기한다.
"이 무한 여덟 살이 어떻게 될 줄 알고. 좀 믿어보면 안 돼? 엄마가 그렇게 하면 온 몸에 힘이 다 빠져서 아무것도 하기 싫단 말이야."
그렇다. 고작 여덟 살이다. 고작 첫여름방학이고 이제 막 시작하는 공부다. 누군가는 몇 학년 선행을 하고 있고 누구는 하루에 4시간씩 사고력 수학을 풀고 중학교 영어를 보고
"이거 진짜 쉽네."
라고 했다지만 돌아보면 나도 그땐 한 개를 배우면 한 개를 모를 때도 많고, 자주 그 한 개도 까먹었다.
엄마표 학습은커녕 방학 내내 외가의 너른 들판과 산을 쏘다니며 방아깨비 잡고 물놀이하면서 새까맣게 태우고 보냈다. 그랬던 내가 지금, 아쉬움이 없진 않지만 하고 싶은 일을 분명히 알고 조금씩 해 나가고 있으며 그런 꿈을 부양할 수 있는 삶, 그럭저럭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다.
'누가 내 자식 아니랄까 봐. 입만 살아가지고.'
속마음은 이렇지만
"아이고, 그랬어. 엄마가 미안해."
사과를 건넨다.
자주 불안하고 흔들리며 그래서 욱하겠지만 아직 닥치지 않은 아이의 미래를 주변의 누군가와 알지 못하는 단톡방의 엄친아들, 엄친딸들과 비교하며 도매급으로 취급하지 않기로 한다. 분명 자기 몫의 삶을 잘 키워나갈 수 있을 거라고 꿀밤 대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궁디팡팡하며 속는 셈 치고 한 번 믿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