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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빨강 Oct 21. 2021

얼굴 모르는 한 소년의 취향

대부분의 월요일과 목요일, 아이 손을 잡고 집을 나서 교문 앞까지 배웅한 뒤 곧장 피아노 학원으로 간다. 부지런한 원장님이 틀어놓은 피아노 연주곡을 들으며 계단을 올라 2층에 위치한 학원의 육중한 유리문을 연다. 문 위쪽 끝에 달려있는 종들이 딸랑딸랑 울림과 동시에 안으로 들어가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 신고 뒤로 돌아서면 어김없이 원장님이 나타나 방문일지에 나와 본인의 이름을 쓰고 체온 체크를 하기 위해 비접촉식 온도계를 들고 서 계신다. 그 곁에서 손 소독을 하고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간단한 안부인사를 주고받으면서 레슨실로 이동해 피아노 앞에 앉아 의자의 위치를 조정하고 가져온 캔버스 천 가방에서 교재들을 꺼내 악보대에 올려놓는다. 체르니, 소나티네, 별도의 연습곡 수순으로 레슨을 받고 남은 시간 동안 혼자 연습을 한 뒤 집으로 돌아오는 일을 주 2회 꼬박꼬박 하고 있다. 글쓰기는 업으로 삼고 싶어 때로는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는 취미 아닌 취미라면, 피아노는 그 어떤 결과도 바라지 않고 연주 자체에 행복을 느끼는 가장 순수하고 즐거운 취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주 2회 레슨, 연습량의 문제도 있겠지만 진도가 빨리 나가지는 않는다. 주로 체르니와 소나티네를 치지만 원장님이 종종 인쇄된 악보를 가져오셔서 연습곡도 쳐 본다. 영화 <LaLa Land>의 OST 한 곡과 아스트로 피아졸라의 'Adios Nonino', 해리포터의 'Lumos' 같은 곡을 연습했고 지금은 아이가 매우 좋아하는 캐러비안의 해적 OST 'He's a Pirate.'의 막바지를 연습 중이다. 오늘도 새 악보를 하나 받았다. 게임 Undertale의 'Megalovania'라는 곡인데 들어보니 아는 곡이었다.


이 곡을 쳐보고 싶다고 원장님께 요청한 아이는 초2학년 남자아이인데, 지난번에 쳤던 해리포터의 음악도 이 아이가 원했던 거라고 한다. 우리 아이가 캐리비안의 해적 OST를 듣고 피아노로 쳐 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처럼 다른 아이들도 각자 좋아하는 음악을 직접 연주해 보고 싶은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 아이 덕분에 평소 연습하던 곡들과 다른 분위기의 경쾌하면서도 리듬감 있는 곡들로 감각적인 연주에 도전해 본다. TV 등에서 가끔씩 들었던 곡인데 직접 연주하니 새로웠다.


얼마 전, 누구였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꽤 권위 있는 전문가가 쓴 글에서 보았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 특히 아들의 게임을 걱정하고 많이 다툰다고 한다. 실제로 1학기 때는 뛰어노느라 여념이 없던 아이들이 2학기가 되어 부모들도 하나 둘 놀이터에 따라 나오지 않게 되고, 너도나도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놀이터의 벤치나 바닥에 삼삼오오 모여 폰을 들고 게임을 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고 있다. 나도 아들을 둔 입장에서 언젠가는 겪게 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가급적 늦게 마주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다.


 전문가는 뭐든 열심히 하는 아이가 게임도 열심히 한다고 했다. 별다른 의욕이 없는 아이는 게임도  하는 반면 다른 일에도 소극적인 반면 매사 열정과 호기심이 있는 아이가 다른 일만큼이나 게임도 많이 한다는 말이다. 피아노 학원의 이름 모를 2학년 아이가 수시로 원장님께 요청하는 악보를 이어받아  보면서  말이 어떤 의미인지  것도 같았다. 매사 열심인 아이이기에 게임을 하면서도 음악이 궁금해 제목을 검색하고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학원에 와서 부탁을 것이 아닐까?


덕분에 들어보기는 했지만 제목도 어디에서 유래된 음악인지도 몰랐던 곡을 신나게 배웠다. 남자아이가 치기에 딱 신나고 호쾌한 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한 남자아이가 피아노 앞에서 신나게 건반을 두드리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다 사라졌다. 이 극적인 음악이 도대체 어떤 장면에서 나오는 걸까? 덩달아 'Undertale'이라는 게임의 스토리도 궁금해졌다. 이런 식의 확장과 연결이라면 게임이나 아이가 소비하는 콘텐츠들을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볼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곡을 끝내면  아이의 관심사는  어디로 옮겨가 있을까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익숙한 틀의 바깥으로  발짝 나가는 것이 점점 부담스럽고 어려워지는 나이에, 직접 만나진 못했지만 세상의 모든 것들이  새롭고 배워야  것들로 여겨질 누군가의 취향을 이어받은 덕분에 혼자였다면 결코 한 번도  보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도전을  보았다. 클라우의 소나티네도 충분히 아름답고 감미롭지만,  무언가가 시작될 것만 같은 'Megalovania' 지금의 내게도  괜찮은 선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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