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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원 Aug 24. 2020

기술이 발전한 미래 세계에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방식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어떤 소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세밀한 내면의 감정을 구체적인 언어로 풀어서 묘사해준다. 그런 소설을 읽을 때면 한국어를 새롭게 배우는 기분이 든다. 이런 감정을 이런 단어로 표현해낼 수 있구나, 단어와 단어를 이렇게 고르고 이어 붙일 수도 있구나, 혹은 이런 인물과 이런 감정도 있을 수 있구나. 그래서 이런 소설을 읽고 나면 감정적으로 동요가 되거나, 이해할 수 없었던 내 감정을 대신 표현해주는 듯한 구절에 위안을 받게 된다. 그나마 읽은 최근작 중에 꼽자면 최은영 작가의 소설들이 그렇지 않을까. 한동안 서점 메인에 계속해서 진열되어 있던 <쇼코의 미소>와 후속인 <내게 무해한 사람> 모두.

 

또다른 어떤 소설들에서는 조금은 더 큰 단위에서 새로운 시선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감정적 묘사에 집중하는 소설이 새로운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둘이 꽤나 구분되어 읽힌다. 이런 글을 읽고나면 감정적인 감상보다는 상상, 가정, 생각을 하게 되는 편이다. 그리고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후자에 가까운 소설이다. 

  

SF단편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아주 오랫동안 서점의 베스트셀러 섹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왜인지 보지 않고 있다가, 생일선물로 받은 김에 읽게 되었다.  SF이니만큼 배경은 모두 과학기술이 극도로 진보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주인공들이 겪어나가는 일들은 지금 우리 사회 속에서 고민하게 되는 일들과 다르지 않다. 차별과 배제, 이주민, 경제적 효율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돌아가는 사회, 여성, 소수자와 관련한 문제들이 유전자를 디자인하고 사이보그를 만들고 우주여행이 자유로운 시대를 배경으로 언급된다. 그러니까 미래에서도 여전한 그 문제들을 두고 어떻게 우리가 인간답게 계속 살아갈 수 있을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지를 질문하게 한다. 단순히 더 발전된 기술로, 결점이 없는 인간들을 만든다고 해서 모든 게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지 않겠느냐는 질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계속해서 답을 찾아갈 것이라는 약간의 희망. 그리고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그 답을 찾아가는 주축이 되는 화자가 여성이라는 것도. 

 

이 글 하나를 쓰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재난 문자가 울려대는 답답한 지구에서, 한편으로는 현실과 똑닮아 씁쓸하지만 조금씩의 희망을 남겨두는 적당한 온도의 단편집.
결점 없는 완벽한 세계에 비하면 괴롭겠지만, 그래도 그보다 많이 행복할 지구가 될 수 있길 바라며.

 


밑줄 긋기


내가 마을에 살았을 때, 나는 사람들이 나의 얼룩에 관해 무어라고 흉보는 것을 단 한번도 느낀 적이 없다. 나는 나의 독특한 얼룩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마을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결점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때로 어떤 결점들은 결점으로도 여겨지지 않았다. 
마을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결코 배제하지 않았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떠나겠다고 대답할 때 그는 내가 보았던 그의 수많은 불행의 얼굴들 중 가장 나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 
그때 나는 알았어.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
그럼 언젠가 지구에서 만나자. 
그날을 고대하며, 
데이지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 잘 자.
처음으로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깔개 위에 몸을 뉘었을 때 희진은 문득 울고 싶었다. 고작 그 정도의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몰랐다.

<스펙트럼>


낡은 셔틀에는 아주 오래된 가속 장치와 작은 연료통 외에는 붙어 있는 게 없었다. 아무리 가속하더라도, 빛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한참을 가도 그녀가 가고자 했던 곳에는 닿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안나의 뒷모습은 자신의 목적지를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
그녀는 언젠가 정말로 슬렌포니아에 도착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끝에.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나의 연인 강보현에게도 사소한 소품들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 보현은 각각의 소품들이 의미를 갖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장식장을 보고 있으면 여행에서 우연히 마주친 낯선 골목의 기억, 소품샵의 진열장과 무엇을 살지 고르던 순간의 두근거림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런걸 기억해서 어디에 쓸모가 있겠냐마는, 나는 아마 '감정의 물성' 또한 그런 사소한 물건들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상술이겠거니 하고 넘겨짚었다. 

<감정의 물성>


"부정적 감정 라인은 판매되는 물량에 비해 실 사용량이 적대요. 다들 쓰지 않아도 그냥 그 감정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언제든 손안에 있는, 통제할 수 있는 감정같은 거죠."
(...)
"선배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제 생각은 이래요. 물성이라는 건 생각보다 쉽게 사람을 사로잡아요. 왜, 보면 콘서트에 다녀온 티켓을 오랫동안 보관해두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사진도 굳이 인화해서 직접 걸어두고, 휴대폰 사진이 아무리 잘 나와도 누군가는 아직 폴라로이드를 찾아요. (...) 그냥 실재하는 물건 자체가 중요한 거죠. 시선을 돌려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거잖아요. 물성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게 의외로 매력적인 셀링 포인트거든요."

<감정의 물성>


"아무래도 아이가 생기면 가정에 집중해야 하잖아. 그런 걸 다 고려했어. 지민 씨가 일 욕심이 많은 건 알지만, 그래도 나는 엄마가 아이를 직접 키우는 게 아이 정서에 좋다고 생각하거든. 지민 씨도 그렇게 생각하지?"

<관내분실>


엄마는 세계에서 분리되어 있었다. 인덱스가 지워지기 전에도.

<관내분실>


"그냥 운이 나빴다고 생각한다, 나는 네 엄마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지. 그것만 아니었어도."
현욱은 변명하듯 말했다.
"어차피 아이를 가지면서 일을 잠시 그만두는 건, 언제나 있어온 일이었으니까."
모든 상황은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사람을 무너뜨린다.
(...)
그녀를 규정할 장소와 이름이 집이라는 울타리 밖에 하나라도 있었다면. 그녀를 붙잡아줄 단 하나의 끈이라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더라면.
그래도 엄마는 분실되었을까.

<관내분실>


어떤 사람들은 재경이 인류를 대표하기에 불충분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어떤 사람들은 재경이 인류의 소외된 사람들을 대표하여 우주로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재경은 과소대표되면서 동시에 과대대표되었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하지만 어떤 비난들은 분명히 재경의 잘못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가 속한 집단 전부의 실패가 되는데,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렇지 않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덧붙이는 말


- 사실 일단 표지가 예쁘다. 소장용으로라도 사기 좋을 디자인.

- 같이 읽기 좋을 것 같은 책 추천: 정세랑 작가의 <지구에서 한아뿐>

- 이전 세대 작가들이 쓰던 한국 소설에 비해(물론 그닥 많이 안읽었지만...), 희망을 놓지 않고 싶은 마음이 드러나는 듯한 건 기분 탓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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