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옌데 Apr 13. 2021

"K-pop=Gay"였던 브라질에서 BTS가 뜬 이유

서구권의 편견을 바꾸는 K-팝과 브라질의 마초이즘

  K-팝이 브라질을 휩쓸기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쯤이다. 90년대 잠시 유행했었던 J-팝에서 일찌감치 K-팝으로 넘어온 일부 마니아층이 그 시작이었다. 초기에는 겨우 몇백 명의 10대 소녀들과 오타쿠 동양문화 마니아들, 그리고 일부 성소수자와 같은 극소수의 팬덤만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은 막강한 충성도와 응집력을 자랑하고 있었고, 그들의 숫자와 영향력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브라질에서 월드컵이 열리던 2014년, KBS 뮤직뱅크가 히우 지 자네이루의 한 대형 실내경기장에서 두 시간 남짓의 특집 녹화방송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샤이니, 인피니트, 에일리, CNBLUE, 엠블랙 등이 출연했던 그날 무대와 제일 가까운 앞자리를 선점하려고 브라질 각지에서 몰려든 수백 명의 팬들이 3박 4일 동안 경기장 앞에 텐트를 치고 대기했을 정도로 뜨거운 열기를 자랑했다. 나와 친구들은 존경심을 가득 담아서 그들을 K-팝 워리어라고 불렀다.


팬들은 저 2시간을 위해 100시간이 넘게 길에서 텐트를 치고 기다린 보람이 충분히 있었다고 말했다.


  오늘날 K-팝 브라질에서 메이저 장르가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마이너로 취급하기엔 이미 팬층이 어마어마하게 두터워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브라질 남성들에게는 한국의 남자 아이돌들이 마치 게이처럼 보인다는 평가를 상당히 많이 접했다. 성(性)에 개방적인 문화와는 완전히 별개로, 브라질의 남녀 성역할에 대한 인식은 의외로 무척 보수적이다.


  부족한 성인지 감수성은 자연스럽게 인종차별과도 연결된다. 즉, 동양인 남자가 잘생기고 키가 크면 십중팔구 게이일 거라는 편견이다. 그래서 스키니진을 입은 날렵한 몸매와 갸름한 턱선을 가진 한국 남자 가수들을 보고 게이 같다고 생각하는 게 그들의 시각에서는 일견 당연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브라질에서는 스키니진이 게이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잘 입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브라질의 전통적인 미남상은 크고 떡 벌어진 어깨와 선명한 사각턱, 그리고 전신에 근육이 나온 전형적인 미국 스타일의 와일드한 마초남이다. 남성이 지배하는 가부장적인 문화라는 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브라질 남성들이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근처에 몸매가 좋은 여성이 지나가면 엉덩이에서 시선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남자들도 상당히 많고(심지어 여자 친구나 아내가 옆에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 길가에서 대놓고 캣콜링(Catcalling: 여성에게 휘파람을 불거나 성희롱 발언을 하는 행위)을 하는 경우도 여전히 많다. 여성을 그저 성적인 대상이나 소유물로만 여기는 브라질의 뿌리 깊은 마초이즘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을 듯하다.


  이건 브라질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서구권 전체에 만연한 인식이다. 2018년에 한국에서 방영된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잘 생긴 한국인 남자 배우를 본 독일인이 "여기 한국인 게이가 있네", "저 남자는 혼혈 같아"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진 사실이 최근에서야 뒤늦게 밝혀졌다. 게다가 해당 방영분에서는 그 발언을 직역하지 않고 자막으로 "여기 잘생긴 한국 남자가 있네"라고 번역해놓는 바람에 더 큰 논란을 낳았다. 분노한 시청자들이 몰려든 방송국 게시판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었고, 결국 해당 방송 회차는 다시 보기 서비스에서 삭제되어버렸다.


  방송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났듯이, 서구권에서는 잘 생긴 아시안 남자들은 혼혈이거나 게이일 거라고 단정 짓는 경향이 있다. 외모, 경제력, 신체조건, 운동신경 등등 모든 면에서 동양인이 서양인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브라질에서는 K-팝이 그저 수많은 서브컬처 중 하나로 끝날 것이라고 섣부르게 단정 짓던 이들도 많았다.




  반면에, 놀랍게도 BTS의 진가를 가장 먼저 알아보기 시작한 것도 브라질 팬들이었다. 2013년에 방탄소년단이 데뷔한 직후부터 브라질의 K-팝 팬들 사이에서는 일찌감치 BTS가 압도적인 인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국내 3대 대형 연예기획사 출신이 아니었던 방탄소년단은 데뷔 직후에 여러 신인상들을 휩쓸긴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데뷔한 지 겨우 만 1년이 된 시점인 2014년 8월에 브라질에서 열렸던 팬미팅에서는 2천여 장의 티켓이 순식간에 매진되며 현지에서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물론 브라질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브라질의 K-팝 팬덤 사이에서는 데뷔 이듬해부터 벌써 BTS가 최고로 인기 있는 아이돌이었다. 그 후 BTS가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자, 브라질 열혈 ARMY들도 한국 팬들 못지않게 기뻐했다.


  BTS가 다른 K-팝 가수들과 차별화되어 브라질에서 빠르게 인기를 끈 이유 중에서는, 아무래도 이들의 건전한 메시지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브라질 대중매체에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고 퇴폐적막장 요소가 많다. 노래 가사들을 들여다보면 아주 높은 확률로 문란한 삶을 즐기는 인물이 등장한다. 꼭 누군가는 양다리를 걸치다가 차이기 일쑤이고, 남녀의 성적인 매력이나 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장면도 흔하다. (어떤 내용인지 굳이 궁금하다면, 브라질 음악은 아니지만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라틴뮤직 [Despacito-데스파시토]의 가사 해석을 한번 찾아보시길. 참고로 이 정도의 노래 가사는 무척 순화된 수준이다)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브라질뿐만 아니라 미국을 포함한 아메리칸 팝 차트의 전반적인 경향이 노래 가사를 통한 메시지의 전달보다는 신나는 리듬과 멜로디를 훨씬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미성년자들에게 적절치 않아 보이는 이런 콘텐츠들에 기겁하는 학부모들에게는, 건전한 퍼포먼스와 희망적인 내용의 가사를 전달하는 방탄소년단이야말로 신선한 문화충격이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꿈을 찾아 이루라는 아름다운 메시지가 담긴 노래를 부르는 팝 아이돌이 있다니? 그래서 자녀가 보는 BTS의 뮤직비디오를 접하다가 부모들이 함께 팬이 되어버리고, 자녀의 팬덤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함께 동참하기까지 한다. 어쩌면 그게 BTS의 가장 큰 매력이자 세계적인 성공요인이라고 볼 수도 있다.


  K-팝성공과 함께, K-드라마도 덩달아 브라질에서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브라질 공중파 방송에서는 대중가요 가사보다도 더욱 자극적인 범죄+스릴러+멜로 장르의 막장 드라마가 항상 인기를 끈다. 국내에서 [펜트하우스]나 [부부의 세계]가 자극적인 내용으로 화제가 되긴 했지만, 브라질 드라마에 비하면 무척 '순한 맛'에 속한다. 브라질의 황금시간대에 방영되는 공중파 드라마들 중 대부분에서는 마약, 매춘, 강간, 사기, 절도, 납치, 폭행, 인신매매, 살인, 방화 등등 현실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범죄가 여과없이 노출된다.


  특히 브라질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들은 바람기가 거의 기본 옵션으로 장착되어 있다. 매번 수많은 여자들과 엮이고 한눈을 팔다가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고, 범죄나 배신에 연루되는 일은 거의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그에 반해 한국 멜로드라마의 남자 주인공들은 보통 잘 생기고, 매너 좋고, 스윗 하고, 능력도 좋고, 무엇보다 여주인공에게 일편단심이다. 브라질의 바람둥이 마초남 캐릭터와는 극명한 비를 이룬다. 어쩌면 K-드라마 주인공들 때문에 브라질에서 한국 남자 가수들에 대한 환상이 더 강해진 걸지도 모른다.




  BTS가 더 크게 성공할수록, 서구권에서 동양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도 함께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처음에는 10대 여학생들과 게이들만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에 가려졌던 K-팝이 어느덧 브라질의 공중파 방송에서도 자연스럽게 소개될 정도로 강력한 팬덤을 얻으면서 조금씩 주류 문화로 올라서고 있다.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을 뒤흔들었던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열풍과 더불어,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이나 [오징어 게임], 그리고 BTS, 블랙핑크 등의 K-팝 아티스트들이 거두고 있는 전 세계적인 성공은 단순히 국뽕이라고만 단편적으로 치부할게 아니다. 특히 해외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삶에도 기여하는 바가 크다. 동양이 기본적으로 서양에 비해 열등하다고 믿는 서구권의 그릇된 인식에 균열이 나고 있다는 걸 실제로도 어느 정도 체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지 않고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다면, 서구권에서도 동양에 대한 편견과 오리엔탈리즘이 점차 사라지지 않을까.


  결국 무지와 몰상식의 견고한 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경제력도, 군사력도 아닌 바로 문화의 힘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째서 브라질 사람들은 다 미남미녀인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