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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하 May 18. 2016

교생실습 1년 전

나의 옛 등굣길

우리집 아파트 단지만 벗어나면 중학교가 하나가 나온다. 내 모교다. 아침 8시 반 전후로 등교하는 중학생들이 여럿 보인다. 내 후배들이다. 그들은 오늘 어떤 감정의 폭풍우를 맞이하게 될까. 괜찮은 척, 밝은 척 하느라 힘들지는 않을까. 집에 가서 괜히 애꿎은 엄마에게 짜증내는 건 아닐까. 오늘도 고생이 많다.    


하나둘 보이는 중딩들과 우리 집 앞의 중학교는 생각만해도 불편한, 일련의 기억들을 끄집어낸다. 주마등처럼 지나간다고 하기도 애매한, 어떤 기분이나 감정 같은 것들이다.      


교문으로 들어서기 전, 주춤거리는 학생들이 눈에 띈다. 교문 앞에는 뒷짐을 지고 선,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선생님이 서 계신다. 학생들의 복장단속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등교 중에 꼭 맞닥뜨려야하는 일종의 관문과도 같다. 오늘날의 그 관문은 내 학창시절의 그것보다는 분명 허물어졌을 것이다. 10년 여 전과 달리 그의 손에는 회초리 비슷한 것도 없다. 그렇지만 그 관문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가 회초리를 들었든 아니든 나는 그의 존재 자체가 불편하다.   



모범생 축에 꼈던 나는, 사실 선생님들의 눈 밖에 날 일이 거의 없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무릎까지 오는 ‘단정한' 치마. 선생님들이 싫어하셨던 칼라 삼선슬리퍼는 내게 없었다. 나는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착한’ 중학생이었다. 복장단속으로 걸린 건 실내화를 안 가져와서 훈계 좀 듣고 마는 정도가 다였다.


그래도 싫었다. 정문을 지나갈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오늘 벌 받는 학생들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정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가끔 벌 받는 것도 쥐구멍에 숨고 싶을 만큼 창피한데 그 친구들은 그게 재밌는건지, 자존심도 없는건지,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실실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손들고 서 있는 친구들, 앉았다 일어났다를 수 십 번 반복하고 친구들의 모습이 내 등굣길 풍경이 되는 게 싫었다. 학생들을 ‘잡으려고’ 서 있는 선생님들이 싫었다.


나의 등굣길은 왜 조마조마해야했는가.      


내 등굣길이 행복할 권리가 무참히 짓밟혔는데도, 나와 내 친구들 그 누구 하나도 그에 대해 반기를 드는 학생은 없었다. 엄두조차 안 났다. 학교와 선생님은 곧 법이었으니까.    




학교 조직은 경직되었고 교사 집단은 보수적이라며 욕하는, 학교를 싫어하는 내가 사범대에 다닌다. 교단에 서고 싶지는 않지만 (어쩌다)사대를 다니다 보니 학교 그리고 교육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이 많다. 내가 목격하고 체험했던 억압들, 나를 억눌렀던 무거운 공기를 다시금 떠올린다.     


내년에는 교생실습을 나간다. 내가 만나게 될 학생들에게 나는 어떤 교생선생님으로 기억되면 좋을까. 당장 내년 교생실습에서 나는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억압하는’ 교사로부터 제외될 수 있을까. 학교에 가서도 내 생각을 지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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