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어도 지어도 모자라기만 한 주택
지옥철로 알려진 2호선이나 9호선을 출근시간에 간혹 경험하게 된다. '빰빠빰빠빰~ 빰빠빰빠빰~ (지하철들어오는 멜로디) 소리가 플랫폼에 울려퍼지면 나는 트랜스포머마냥 꾸깃꾸깃 몸을 접고 구부려 표면적을 최소화 시킨다음 문이 열리면 나비같이 날아올라 순식간에 빈 공간을 공략하리라 다짐한다. 하지만, 문이 열리기 직전 3시 방향에서 스텔스 모드로 나타난 뽀글머리 아줌마 A는 빛의 속도로 내 옆구리를 비집고 들어와 지하철에 머리를 집어넣는 신공을 펼친다. 진로가 막힌 나는 슬라이스 치즈가 되어 붙어보려고 바둥바둥 버티기를 시도하지만 삑삑삑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면 대패삼겹살 마냥 문 밖으로 튕겨져 나가 버리고 만다.
운수 좋은 날도 있다. 짧은 다리에 굵고 짧은 목을 가진, 옵티머스(트랜스포머 대빵로봇)급 아재 앞에 서있는 경우, 순식간에 지하철 깊숙이 빨려들어가는 순간이동 텔레포트를 경험하기도 한다. 거대한 지하철 반죽과 하나로 철퍼덕 합쳐지고 나면 팔다리는 제대로 딸려들어왔나 까딱까딱 확인을 해보고 우리는 그렇게 화석처럼 굳어진채 다음 정거장까지 서로의 몸과 몸을 기대어 여행을 떠난다. 옆에 서있는 아가씨는 오늘 아침 팬틴샴푸로 아침을 시작하고 왔으면 좋겠고.. 입안에 27종 박테리아를 키울것 같은 아저씨는 제발 그 입 다물라.. 절로 기도가 나온다.
출근시간 지하철은 무려 3000명을 한번에 태우고 2분 간격으로 쉴새없이 시민들을 실어 나르지만 우리는 짐짝같이 실려 우아하지 못한 아침을 시작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도시와 주변에 살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서울수도권은 현재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메가시티 (1위 도쿄, 2위 자카르타, 3위 서울수도권, 4위 델리, 5위 상하이)이고 차를 타고 올림픽 대로를 달리다 보면 한강변을 따라 끊임없이 빼곡히 늘어선 아파트를 보게된다. '서울에 집이 정말 많구나. 그런데 저렇게 빽빽하게 들어선 집 하나 장만하는건 그렇게도 힘들구나..'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는 집은 충분히 있는거야?
2014년 대한민국의 주택 보급률은 103.5%로 한 가구에 집이 한채씩 돌아가는데 문제는 없는듯 하다. 하지만, 이건 전국 평균이고 많은 사람들이 집문제로 눈시울을 붉히는 서울은 97.9%, 경기 97.8%로 한 가구에 집이 한채씩 돌아가지는 않는다. 선진국 일본의 115%, 미국의 111%에 비하면 꽤나 낮다. 또한 요즘은 핵가족화가 심화되면서 가구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1인가구가 늘면서 주택보급률을 가늠하는 척도로 1000명당 주택수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미국의 410호, 영국의 434호, 일본의 451호에 비해 한국의 비수도권 주택수 415호는 나쁘지 않지만, 수도권의 경우에는 1000명당 주택수가 355호에 불과하여 우리가 체감하고 있는 만큼 주택은 부족 하다는 것을 엿볼수 있다. (주택이 부족하다는 의견에 반대논거를 제시하는 분도 계시다. 클릭 )
집이 부족하면 그만큼 더 지으면 되는거 아녀?
(주택공급) 집값상승은 가장 간단하게만 보면 수요가 공급보다 많기 때문이니, 집값을 잡으려면 수요보다 공급을 늘리면 된다. 특히, 단기간에 신규공급 물량을 늘리려면 시내에 땅을 사서 펜스치고 공사하는 것보다는 대규모 허허벌판 택지를 조성하는게 싸고 빠를터. 가장 대표적인 예가 88서울올림픽 바로 이듬해에 발표된 분당, 일산 등의 5개 신도시개발이다. 우리나라 경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한 획을 그은 서울 올림픽은 '이제 우리도 먹고 살만해졌으니 허리띠 좀 풀겠습니다.'의 분수령이었고, 마침 전세계는 3저 (저환율, 저유가, 저금리)의 승천기운을 타고 경기가 수직으로 치솟던 터라 집값은 3년새 56%가 폭등하여 민심은 폭동이라도 일으킬만큼 악화되고 있었다. 이때 보통사람 노태우는 '박정희는 1970년대 도로를 뚫은 '길 대통령'이라면 나는 주택을 짓는 '집 대통령'으로 남고싶다'며 그 유명한 '200만호'건설계획을 발표하고 주택시장을 한방에 평정해 버렸다.
당시 200만 호는 서울시내 전체 주택수와 맞먹고 우리나라 총주택의 1/3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였고 덕분에 우리나라 주택 보급률은 87년 69% (서울 50.6%)에서 10년만에 92%까지 껑충 뛰어 올랐다. 쏟아지는 물량에 가수요는 모습을 감추고 집값은 몇년간 안정을 찾았다. 저 정도의 물량을 공급하려면 사실 적어도 몇년의 준비기간과 검증을 거쳐 몇년은 지어야할텐데, 노태우 정권에서는 슈퍼 울트라 대형 개발 계획을 세우고 땅을 확보하고 도로와 상하수도 가스 시설등의 기반 조성을 하면서 214만채의 집을 짓는데 걸린 시간이 불과 2년. 89년 2월에 계획을 발표하고 91년 8월에 목표를 조기달성해 버렸다. 그 후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보기드문 집값의 평화가 찾아왔다.
그럼 계속 이렇게 지으면 되겠네
(신규공급) 물량 쏟아붓기로 집값을 잡고 혼탁한 세상에 평화가 찾아왔다면, 앞으로도 계속 집을 지으면 된다. 근데 그러려면 땅이 있어야 한다. 5대 신도시를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추진할때는 사회적 합의나 주민 의견수렴등의 중요한 단계들을 건너뛰었다. 그러다 보니 선조부터 내려오던 땅을 하루아침에 수용당하고 농약먹고 자살하는 농민이 나왔다. 그렇다고 이 사람 저 사람 얘기 다 들어주면서 토지를 매입한다면, 그동안 기대심리만 고조돼 토지 보상에 시간과 돈이 계속 들어간다. 하기사 서울시 및 수도권에서는 그나마 개발할수 있는 땅들을 다 개발해버렸고 이제 남은 땅들은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택지들, 그린벨트 정도인거 같다. 지역정부와 중앙정부의 견해차이, 실권자의 정치적 이해, 주민들의 기대와 반발 때문에 땅을 확보하기는 더더욱 힘들어 지다보니 개발지역은 서울에서 성큼성큼 멀어지기만 한다. 대표적인 2기 신도시 동탄은 서울외곽에서 무려 30km나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을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땅이 있다고 주택공급을 늘릴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물가가 일년에 10%씩 올라가던 개발시기에는 집을 짓게 되면 물가가 오르고 덩달아 집값도 또 오르기 때문에 정부에서 분양가를 얼마이상 못받도록 가격을 묶어 물가를 잡었는데, 밑지는 장사를 할리 없는 건설사들은 땅을 놀릴지언정 당시에는 집을 지을수가 없었다. 또한 은행에서 건설자금을 빌려야 공사를 할수 있는데 금융시장이나 주택시장의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집을 지을수 없다. 누울자리는 보고 누워야지.
아님 기존 도시를 밀고 새로 지어 보든가
(뉴타운/재개발) 건설이라고 하는 행위는 전적으로 정부의 가이드라인 하에서 움직인다. 도시에는 도시계획이라는게 있고, 모든 땅에는 지을수 있는 건물의 용도와 크기가 미리 정해져 있다. 1종전용주거지역 이라는 곳에는 땅이 100평 있으면 건물을 100평까지밖에 못짓지만 준주거지역에는 400평까지 건물을 지을수가 있다. 이렇듯 땅이 모자라면 정부에서는 토지의 용도지역만 바꿔주면 집을 더 지어 올릴수가 있다. 노태우 정권의 200만호 건설 당시 다가구 주택 (집주인은 한명인데 여러채의 집이 한건물에 들어있는)은 요건을 완화해주자 이면도로를 빼곡히 매우며 서민주택을 늘리는데 일조했지만 도시 주거환경 열악화의 주범으로 내몰리기도 했다. 게다가 도시 기반시설은 용량이라는게 있어서 100명이 살도록 설계한 도시에 500명이 살게 된다면 물도 모자라고 도로도 좁아져서 살수가 없다. 그래서 용도변경은 정말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쉽지가 않다. 이럴때는 아예 다 갈아엎고 새로 판을 큼직하게 짜버리는게 좋을수 있는데 우리가 익히 들어봤음직한 뉴타운 개발이 이런식이다.
처음에는 '뉴타운 =대박'으로 받아들여지며 너도나도 뉴타운으로 지정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하지만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삽한번 못파본 곳이 전체의 1/4이요 오히려 뉴타운 지정을 해제해 달라는 민원이 빗발치고 있다고 한다. 무리한 뉴타운 지정으로 땅값만 올라버려 사업타당성이 안나오고 프로젝트는 지연되다보니, 이런저런 분쟁만 일어나고 주민들 피해만 커진 것이다. 애초부터 뉴타운 정책은 겉만 번지르하지 실제로는 그곳에 살던 원 주민들을 쫓아내는 개발방식이라는 비난을 한몸에 받던터라 뉴타운은 잘돼도 못돼도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지금있는 집만 부수고 지으면 안돼?
(재건축) 우리나라의 짧은 도시개발 역사에서 단지형 아파트들은 이미 도시계획에 맞춰 지어놨고, 재건축은 기존에 살던 집을 새집으로 교체하는 수준에 그치기 때문에 신규 공급이 적다. 전체 재건축 크기의 10% 정도에 그치기도 한다. 해당 주민들은 재건축만 되면 로또 당첨처럼 재산증식이 가능하다고 믿고 쑥과 마늘만 먹으며 오늘도 오매불망 정부의 허가만을 기다리지만 애당초 개발이익이 조합과 건설사에게 돌아가는데 신규공급은 적고 주변 집값만 끌어올리는 재건축을 정부에서 쌍수들고 환영만 할수는 없을듯 하다. 최근 압구정 잠원 지역 1만 세대 아파트 단지들은 재건축의 파란불이 켜지면서 35~40층 새집을 올릴 생각에 주민들 가슴이 뛰고 있고, 주변지역 사람들은 덩달아 재미 좀 볼수 있지 않을까 가슴이 설레고 있지만, 집은 없는데 집값이 계속 올라갈까 가슴을 졸이는 사람들과 그때라도 집을 살걸 마누라 말 안들은 자신을 후회하며 가슴을 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불편한 진실때문에 재건축은 늘 뜨거운 감자다.
(리모델링) 이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리모델링의 경우에는 기존 집을 허물지는 않지만 내부를 다 털어내고 새로 공간을 구성한다. 복도식 아파트를 개조해 계단식 아파트로 변경하거나, 베란다 앞을 증축해 집을 넓히는 등 집의 평면구성을 새롭게 만든다. 이러한 아파트 위에 몇개층을 더 높여 지을수만 있으면 그만큼 추가되는 새집은 팔아서 공사비에 보탤수 있다. 물론, 한두개층 올려봐야 신규 공급의 양은 많지 않지만. 그런데 최근 정부에서는 이러한 수직 증축을 위험하다고 못하게 하면서 리모델링 시장은 깝깝하게 되었다. 사실, 1기 신도시인 분당은 이미 개발된지 20년이 넘었지만 재건축은 애매하고 현실적 대안이 많지 않은데 그나마 눈여겨보던 리모델링마저 힘들어 지니 주택경기가 그나마 살아있을때 새아파트로 단장도 하고 재테크를 준비하던 사람들 마음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물들어왔을때 노젓고 싶은 경기도민 사람들의 마음은 갈팡질팡이다.
헐...또 뭐 없나? 이게 다야?
주택공급의 또 다른 축으로는 임대 주택도 있다. 2014년 기준 우리나라 공공임대주택은 109만채로 전체 주택의 5.5%정도를 차지한다고 한다. 복지가 좋은 구라파 국가(EU: 영국, 프랑스)들에 비하면 1/3수준에 그치는 수준이기는 하지만, OECD의 당당한 대한민국도 체면치례는 해야하니 지속적으로 공급량을 늘리고 있는 상황이다. 2000년대 중후반 공공임대 주택은 전체 주택물량의 20~40%를 담당할 정도로 집중적으로 양을 늘렸지만, 2010년대 들어서는 10~20%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민간주택 공급량은 늘어가는데 임대주택의 상당수를 공급하는 LH토지주택공사의 공급물량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LH의 부채가 늘면서 공공 임대주택 사업 규모를 줄였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반면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다양한 임대주택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시의 2030 청년주택등). 임대주택은 '휴거 (휴먼시아 거지)'로 논란이 되며 여전히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계가 있지만 필수재인 주택의 저변을 넓히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다음에는 냉탕과 온탕을 오고가며 혼란을 겪는 주택시장을 조절하는 정부정책에 대해서 조금더 알아보겠습니다. 선선한 가을 바람을 와방 느끼시는 행복한 가을 시작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