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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림 Jul 27. 2024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위한 제언

내 전 남자 친구가 본인에게만 이야기했던 나의 은밀하고도 소중한 이야기를 본인의 소설에 썼어.

난 그게 너무 화가 나고 상처가 돼.


그래서 난 그 자식한테 사과하라고 요구했어!

그런데, 돌아온 사과인지 해명인지가 너무너무 형편없어.

내가 어느 정도는 허락한 줄 알았다나?!


하, 뭔 개소리야?!!!


난 더 화가 났어. 너무 화났어!


넌 개인적 사과가 아니라, 공개적 사과를 해야 해! 무조건!!!

그리고 난 문화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물으려고 해!


문학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라고.


1.

전 연인이 나뿐이 아닌, 나의 지인조차 눈치챌 수 있을 정도의 수준으로 본인의 소설에 당신의 이야기를 담았다면 마음이 남아 있다는 거지요. 다르게 표현해, 내 마음 여기 있어. 잊지 말아 주라. 이런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설 속 '나'로 추정되는 캐릭터가 무언가 괴상합니다. '나'긴 난데 교묘히 난도질해놓은 거 같습니다. 그렇다는 건 실제로 헤어진 당신에게 마음이 남아있지만 상처받은 존재로 남기고 싶었던 겁니다. 물론 추측입니다. 하지만 맞을 겁니다. 의도없는 표현이 어디 있나요? 


하여, 그 소설가(?)의 방식과 수준은 지질했고, 어설펐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혼나 마땅합니다. 혹은 벌 받아 마땅합니다.

당신은 공개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 함께 벌을 내려주세요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2. 

이것은 완전히 사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어느 연인, 그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굳이 공개적인 사과와 논쟁을 원한다면 그나마 담을 만한 공간은 네이트 판이나 디씨 인사이드 혹은 제가 모르는 어떤 대중적 공간입니다. 즉, 문화계 광장은 아닙니다. 문학과 거의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문학과 거의 상관없다는 말은 사실 문학이 관여하지 않을 수 있는 인간사란 없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시공간을 초월해 인간사 모든 공간에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3. 

여러 경로로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등장해, 자신들과는 하등 인연도 없는 어느 헤어진 연인의 현재 진행형 이야기에 숟가락을 얻는 것을 보았습니다. 겁나 한가한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창작을 합시다. 상상을 합시다. 좋은 이야기를 생산합시다. 좋은 이야기는 물론 주관적인 영역이지만 치열하게 고민하고 글을 씁시다.(나 포함)


4.

소설가가 본인 연애 경험을 본인의 소설에 담아도 되는가? 를 질문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혹은 담아도 되지만 당사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 질문은 우문입니다.

경험하지 않은 세계에서의 창작은 불가능합니다. 하여 창작자는 경험에 집착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것에 더욱 집착해야 합니다. 그것이 소설가 혹은 창작자의 업무이자 소명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창작자는 치열하게 경험을 넓히고 죽도록 기록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록된 존재에게 허락을 받아야 합니까? 

이것이 전 여자친구 이야기니까 그렇지 개미나 바람에 대한 소설이라면 허락을 받겠습니까?  


그러니 왜 기분 나쁜 가를 다시금 생각해 보세요.

내 이야기를 담아서?

내 허락을 요청하지 않아서?


아니요. 소설 속의 '나'로 추정되는 캐릭터가 짓밟혀 표현됐기 때문입니다.


소설 속에 '나'로 추정되는 캐릭터가 '나'에 대한 찬양에 가깝다면요?

소설 속 '나'가 너무나 아름답게, 현실을 살아가는 나의 욕망을 너무나 정확하게 표출해 냈다면요?



 5. 

저는 이 사건으로 인해 관심도 없던 어떤 소설가가 유명해지는 시간을 목도했습니다. 알고 싶지도 않은 어느 소설가가 계속 거론되었습니다. 궁금했던 어떤 독자들은 그 소설가의 소설을 사서 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벌을 주고 싶은 겁니까? 보상을 주고 싶은 겁니까?


6.

저라면, 사과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을 겁니다.

사과의 기회를 주면, 사과를 받아야 할 시간이 다가올 수 있고, 그러면 용서의 시간까지도 다가올 수 있습니다. 물론, 용서를 안 해도 되겠지요. 하지만 이미 이 사건을 온 세상에 천명한 이상, 용서를 하지 않을 이유까지 대중들이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사과할 기회를 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저의 제언입니다.


몰랐고, 영원히 모르게 해 주세요. 어느 비겁한 소설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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