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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바람 Apr 23. 2018

06. 그깟 종이 한 장이 뭐라고

상기 환아는 사회적 의사소통 장애, 반복적이고 제한적인 관심사와 행동을 보이며, 최근 실시한 평가에서 시각통합발달검사 (VMI) 2세 11개월, IQ=56, SQ=48, K-CARS=30.5로 자폐스펙트럼 장애로 진단함.


27개월에 아이의 치료를 시작하고, 약 1년간 조기 집중교육을 받은 후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아 장애등록을 하기 위한 진단서를 받았다. 아직 나이도 어리고 앞으로 더 좋아질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일찍 장애등록을 하느냐고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장애등록을 한다고 해서 맞벌이 부부인 우리에게 별다른 금전적 지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받을 수 있는 국가의 지원은 전기요금 몇 천 원 감면과 장애인 주차구역 주차, 통행료 할인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분주히 장애등록을 위한 방대한 서류를 준비했다. 두툼한 서류뭉치와 똘똘하게 나와서 더 마음을 아프게 만든 증명사진을 품에 안고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해 주민센터 앞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나는 공식적인 장애아의 엄마가 되었다.


내가 정신을 좀 차리고 싶어서 그래.

 머리로는 받아들였는데, 내 마음은 여전히 아이의 장애를 외면하고 싶어 했다. 자폐성 장애는 눈에 보이는 장애도 아니고 원인도 알 수가 없다. 난산이나 조산 등의 후유증으로 발달장애가 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 물론 유전자의 결함, 장의 질환, 예방접종 백신의 부작용, 환경오염(중금속) 등 저마다 나름의 논리로 원인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지만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인과관계는 없다. 이유도 모른 채, 삶을 뒤흔드는 거대한 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은 내게 무척 버거운 일이었다. 특히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장애를 마음을 다해 이해하기에 나는 작은 그릇을 가진 사람이었다.

 내일 아침, 잠든 나를 깨우며  "엄마 아침이야, 일어나세요"라고 말해주는 기적이 오기를 셀 수 없이 기대하며 잠이 들었고, 새로운 치료를 시작하면 이번엔 진짜 아이가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헛된 상상을 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는 늘 '역시나' 하는 좌절로 끝이 났고,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리가 불편한 사람에게 걷기를 강요하지 않고, 손이 불편한 사람에게 왜 손을 못쓰냐고 묻지 않는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어려운 장애를 지닌 발달장애인에게는 명확한 대답을 듣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묻는다.

 대체 왜 그렇게 행동하는 거냐고?.....

 네모, 세모, 동그라미는 금방 이해해도 몇 년을 가르쳐도 여전히 색구분을 못하는 아이, 등산을 가면 엄마보다 먼저 정상에 오르는 체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옆으로 나란히'와 같은 단순한 동작을 따라 하지 못하는 아이를 답답해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5년 후 재판정 시기에 아이가 좋아졌으면 장애등록을 취소하면 그만이다. 매도 일찍 맞는 것이 낫다고 일단 무조건 아이의 장애를 수용하는 결단이 필요했기에 서둘러 장애등록을 했다.

 하지만 그 종이 한 장이 우리 부부에게 주는 울림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아이의 해사한 웃음, 애교 어린 표정은 어제와 오늘 달라진 것이 없는데 장애가 적힌 종이 한 장은 갑작스럽게 우리를 지옥으로 빠뜨린 것 같았다.  우리는 왜 그토록 한없이 슬프고 괴로웠을까?

 돌이켜보면 그건 매체에서 보여주는 실체 없는 공포 때문이었다. 방송에서 보여주는 장애인 가족의 고단한 삶은 지나치게 비극적이어서 끝까지 보기가 힘겨울 정도였고, 연이은 장애인 가족의 동반자살 뉴스는 우리로 하여금 너의 행복은 다 끝났다고, 이제부터 불행 시작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우리는 다가오지 않은 불행을 미리부터 걱정하고 슬퍼하고 있었다.


 잠시 방황을 하면서 성인 장애인 가족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소소한 행복과 꿈 그리고 눈물과 좌절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장애가 있든 없든 슬픔과 기쁨은 적절한 비율로 사람들의 삶에 찾아들었고 단지 남들보다 조금 더 불편한 일상이 있을 뿐이었다. 이제 우리가 걸어갈 길이 조금 명확해 보였다. 그깟 종이 한 장은 나를 따끔하게 혼낸 뒤 부유하는 마음을 잡아주었고, 장애에 대한 내 이해의 폭은 조금 넓어졌다.

극복하는 게 아니라 그대로 인정하는 것.

마음이 안정되고 나니, 왠지 꺼려지기만 했던 장애인복지관의 잘 짜인 프로그램을 이용하게 됐고, 처음 보는 발달장애 청년이 다가와 엉뚱한 말을 걸어도 맞장구를 쳐주는 여유도 생겼다. 자신과 대화를 해주는 낯선 아줌마 덕에 신이 난 청년이 긴 대화를 이어가면 어떻게 이야기를 끊어야 하는지 요령도 생겼다.

 그리고 요즘은 매일 아침, 아들의 굿모닝 뽀뽀와 웃음소리를 들으며 눈을 뜬다. 아기 때부터 매일 아침마다 엄마, 아빠의 뽀뽀를 받아서인지, 언젠가부터 아이는 마치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깨우는 왕자님처럼 눈뜨자마자 내 침대로 다가온다. 덕분에 "엄마, 아침이야 일어나세요"라고 말하는 기적은 내게 오지 않았지만 더없이 달콤한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먹을 때에도 엄마, 아빠가 조금만 달라고 하면 아낌없이 내어주고는 혹시라도 다 먹을까 봐 눈치를 살피는 천진난만함.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다가도 엄마가 정리를 하라고 하면 두 손 가득 옷을 들고 빨래통에 넣어주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순수한 사랑을 배운다.

기꺼이 엄마의 청소를 돕고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아빠에게 주고 눈치보는 순수한 모습


엄마, 아빠는 빨리 자라지 않는다고 또는 뻔한 실수를 한다고 여전히 실망하고 다그치는데, 아이가 보여주는 우리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이 너무 감사하고 미안할 때가 있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렇게 행복한 일상을 이어갈 줄 알았다면 장애진단서를 받아 든 3년 전, 그토록 방황하고 헤매지 않았을 텐데...

오늘도 뽀뽀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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