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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Aug 08. 2019

글렌 클로스의 표정

드라마 <웨스트윙> 시즌5 17화 리뷰

웨스트윙 시즌5 17화. 다시 봐도 넘 좋은 에피소드. 이 에피소드에서 바틀렛 정부는 심장마비로 급사한 대법관 브레이디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신임 대법관 후보를 찾는다. 브레이디는 보수 정권이 임명한 보수 판사라서, 공화당은 '적어도' 중도적인 판사가 임명되길 바란다. 바틀렛의 참모들은 물론 진보적인 판사를 임명하고 싶어하지만, 상하원 다수당을 공화당이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라 강행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중도 성향의 판사들을 뽑기로 마음을 먹는데, 그 전에 대법관 지명자 이름이 유출되지 않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여러 후보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블러핑을 펼친다. 그렇게 오게 된 판사 중 하나가 에블린 랭.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모델로 창작된 캐릭터로, 엄청나게 똑똑하고 진보적인 판사라서 공화당이 기함을 터뜨릴 후보다. 똑똑한 에블린 랭은 그 사실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자신이 이곳에 불려온 것이 블러핑의 일환임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도 조쉬와 토비는 예의상 인터뷰를 하는데, 와씨, 이러다가 에블린 랭한테 반해버린다. 개쩔어! 이 사람을 꼭 대법관으로 만들어야 돼!



하지만 앞서 말했듯 공화당은 이에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때 조쉬가 아이디어를 낸다. 공화당이 선호하는 보수적인 판사를 한 명 세운다. 대신 고령의 치매끼가 온, 엄청나게 진보적이고 존경받는 대법원장이 퇴임하고 그 자리에 에블린 랭을 세운다! 진보-보수의 균형을 맞추는 동시에, 최초의 여성 대법원장을 만듦으로써 역사를 개척하는 묘수. 문제는 공화당이 선호하는 판사가 누구냐는 거다. 그의 이름은 크리스 멀리디. 안토닌 스칼리아를 모델로 창작된 캐릭터로, 말하자면 '헌법 문자주의자'다. 즉 18세기에 만들어진 헌법을 21세기에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판결해야 한다고 믿는, 극보수주의자다. 이게 무슨 말이냐? 헌법에 적혀 있기만 하다면 인종차별도 가능하다고 믿는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이니 바틀렛 정부가 망설일 수밖에. 그래도 또 예의상 일단 백악관으로 불러는 보는데, 여기서 우연히 마주친 에블린 랭과 아주 우아하게 토론을 벌이는 모습(참고로 이것도 긴즈버그와 스칼리아의 실제 관계를 참고한 것이다)을 보고 조쉬와 토비는 결심을 하게 된다. 게다가 토론 과정에서 크리스 멀리디의 중요한 신념 하나를 확인한 것이 컸다. 그는 헌법 문자주의자라고 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헌법에 적혀 있기 때문에 삼권분립은 신성하다고 믿는다는 뜻이다. 그 자신은 극보수주의자이지만, 중요한 사회적 의제들에 대한 판단은 입법부의 역할이기 때문에 대법관이 개인의 신념으로 개입해선 안 된다는 그의 말이 조쉬와 토비를 움직였다.


하여간 이런 과정을 거쳐 기존 대법원장인 로이 애쉬랜드는 퇴임하고, 에블린 랭과 크리스 멀리디가 대법관에 동시 지명되게 된다. 물론 대법원장은 에블린 랭, 최초의 여성 대법원장 탄생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애쉬랜드는 퇴임사를 하고 랭과 멀리디는 대법관 지명 발표에 참석하기 위해 백악관에 오는데, 여기서 랭은 TV로 애쉬랜드의 퇴임사를 본다.


첨부한 스틸컷이 바로 퇴임사를 지켜보는 랭. 옆에서 대통령이 준비됐냐고 묻는데도 대답은커녕 쳐다도 안 보고 퇴임사를 본다. 이 표정이 너무 좋았다. 정말 너무 좋았다. 아, 참고로 로이 애쉬랜드는 극중에서 거의 전설적인 법관의 포지션이다. 진보적이지만 너무나 품격이 넘쳐서 양쪽 모두로부터 존경을 끌어 안는 노법관. 또한 진보 법관들의 우상. 그런 그의 퇴임을 지켜보는, 곧 그의 자리에 오를 최초의 여성 대법원장. 이 장면에서 랭의 표정은 곧 대법원장이 될 자신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애쉬랜드에 대한 존경에 가까워 보인다.



내 기억에 이후 에피소드에서 에블린 랭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즉 이번 에피소드 딱 한 번 나올 캐릭터라는 얘긴데, 그럼에도 이렇게 신중하고 품격있게 표현해낸 작가가 새삼 대단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캐릭터를 연기한, 저 표정을 연기한 배우가 가장 대단하다. 뒤늦게 배우 이름을 찾아보니 글렌 클로스, 익숙하다 싶더니 <더 와이프>에 출연한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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